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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승연 Oct 16. 2020

사치할 여유는 없어요

그래도 날 위한 유일한 사치 하나쯤은   

“또 주워왔냐? 물건 함부로 막 주워오는 거 아니래. 누가 버린 건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막 가져오고 그래.”

“응? 뭐가 어때서. 정말 깨끗한 건데. 이런 건 버린 게 아니라 누구라도 가져갔으면 하고 놔둔 걸걸.”     


올해 이사한 동네는 분리수거장에 폐기물 버리는 곳이 함께 있었는데 날마다 새로운 물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떤 날은 아무 흠집 없는 책장이나 책상이, 또 어떤 날은 아이 엄마라면 바로 알아볼만한 꽤 괜찮은 유모차와 자전거가 있었다. 첫째와 터울이 있는 둘째라 둘째 물건이 거의 없었는데 덕분에 장난감과 유모차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뭐? 이번엔 또 어디야?”

“아 오늘은 엄청 가까운 곳이야. 땡큐~”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던 첫째는 커갈수록 점점 다양한 책을 보고 싶어 했다. 누가 책을 준다고 하면 내가 운전을 못하니 남편이 이 집, 저 집에 가서 책을 받아오곤 했다. 어얼리 답터에 맥시멀 리스트인 남편은 이런 나를 몹시 못마땅해했다. 자고로 물건은 비싸더라도 좋은걸 사서 오래 쓰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청승이라고 하고, 어떤 날은 유난이라고 혀를 끌끌거렸다.     


“돈 벌어서 다 어디 쓸건데?”

“응? 책사야지. 내 책!”


그랬다. 우리 집 살림살이를 보자면 엥겔지수가 가장 높았지만 개인적인 소비의 8할은 책 구입이었다. 물론 빌려서도 본다. 도서관에서 근무 중인 나는 마음만 먹으면 책을 양껏 빌려서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도서관 책을 더 많이 보도록 화장실도 참아가며 엉덩이 땀나게 일하는 게 내 일 중 하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책만은 사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작가의 끄적임이 그대로 인쇄된 책 <책은 도끼다>의 한 페이지


나에게 책 구입은 저자에 대한 일종의 예의 같은 거다. 책 한 권 쓰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썼을 텐데 그 작가의 진심을 작가의 입장에서 충분히 느껴보는 게 독자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책은 백지상태여야만 한다. 하얀 종이에 꼭 밑줄을 긋고 색칠도 하고, 뭐라도 끄적여야 비로소 내가 책을 온전히 읽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펜을 안 챙겨 와서 지하철 같은 곳에서 책만 펼쳐들고 읽어야 할 때는 마치 수프를 반만 넣은 라면처럼 밍밍한 기분이 들었다.     


뭐든 무난한 게 좋다. 옷, 신발, 화장품 같은 패션 소품은 물론이고 이불, 커튼, 가구 등 생활용품도 무난한 걸 가장 좋아한다. 내 기준은 심플하고 깨끗한 것 중에서 가장 싼 거. 엄마들이 깐깐하게 고른다는 육아용품을 고를 때도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젤 많이 사는걸 가격 비교해서 가장 저렴한 걸로 구입한다.  누가 뭐 준다 하면 마다하지 않고 받아서 쓰고, 또 싫증 나면 과감하게 버리기도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 책을 구입하는 데 있어서는 가격비교도 하지 않고 충동구매를 하기 일쑤고, 한번 책장에 꽂힌 책은 쉽사리 방출하지도 않는다.  신문의 북섹션에서, 이웃블로그에서 본 책이나 잡지를 읽다가, 서점에 갔다가, 라디오를 듣다가  내 마음에 꽂힌 책들은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 두고 한꺼번에 구입한다. 엄마의 책이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자기 택배인 줄 알았다가 매번 실망하기 일쑤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그렇게 새 책을 맞이할 때 비로소 내가 꽤 주체적인 인간이고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있다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여행지에 가면 그 지방, 그 나라의 음식을 꼭 먹어보는 것처럼 나는 그곳의 책방에 들린다. 외국이라면 책방에서 파는 굿즈를 사거나 그림이 많은 책을 사고(외국어는 어렵다;;) 국내라면 그날 내 기분에 따라 책을 고른다. 그리고 구입한 책을 읽는 데는 이틀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쓴다. 일종의 유통기한이라고나 할까. 내가 본 그곳의 풍경과 그날의 느낌이 증발하지 않도록 그 마음을 최대한 붙잡기 위함이다.     


내 마음을 딱 잡아 붙들고 작가와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그 책은 내 책이 되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책 사이사이 일기도 적고 그림도 그려보며 때를 입힌다. 누군가는 책을 훼손한다고 뭐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책으로 우리 집 책장을 채워야 안심이다. 그렇게 집으로 온 책은 언제든지 꺼내어 봐도 그때의 기분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어제는 남편과 결혼한 지 8년째 되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케이크에 초 한번 불고 끝나는 하루가 아쉬워서 신혼여행지에서 사 온 책을 슬쩍 꺼내보았다. 스페인어도 알지 못하면서 책을 본다며 비웃는 남편을 무시하고 책장을 넘겨본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이 예쁜 요즘, 이런 하늘을 보며 책을 펼치고 있으니 여기가 바르셀로나다. 책 한 권으로 바르셀로나까지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값싼 비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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