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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빛승연 Oct 30. 2020

열정은 없어요   

그래도 인생의 온도를 높이고 싶은 날은 찾아온다 



'살면서 무언가를 해낸 경험을 적으시오.'
'살면서 가장 실패했던 일과 그 일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적으시오.'


취업준비를 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적다 보면 꼭 이런 문항이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쓸 말이 없었다. 그땐 '지금은 비록 쓸 말이 없지만 나중에 취업하고 나서, 일하면서 경력을 쌓다 보면 이걸 다 채울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자신 있게 적을만한 게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업무 성과 측면에서 적는다면 꽤 적을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업무가 아니라 나의 인생 전반에서 돌아본다면? 취업을 준비하던 대학 졸업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지만 전공을 살리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4학년 때까지도 난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생기면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참 쉽게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니까 승무원을 하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항공사 면접장에 가기도 했고, 책이 좋아 막연히 출판사에서 일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1:1 면접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졸업이 다가오자 남들처럼 대기업 취직을 목표로 토익도 보고, 자기소개서도 쓰면서 취업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전공을 살려서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왜?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엄청난 계기가 될 때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중에서



그날도 학교 강당에서 취업특강이 있어서 들으러 갔다. 꽤 유명한 강사님이었기 때문에 학생들로 강당이 꽉 차 열기가 무척이나 후끈했다. 면접 스킬을 배우고 싶었는데 강사님은 생각보다 원론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세요   


평소 같으면 그냥 흘려들었을 법한 이야기다.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날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어버려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동안 힘들게 수집했던 취업 정보며, 취업스터디 책을 버리고 이력서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내가 4년 동안 배웠던 전공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하겠다고 몇 개월간 준비했던 걸 과감하게 버리고, 강사의 말 한마디에 그리 쉽게 흔들렸던 걸 보면 내 마음속 저 깊숙한 곳에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던 걸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전공을 살리기로 하자 생각보다 취업이 쉬웠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비슷한 일이지만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런 순간이 오면 이상하게 또 그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한 직장에서 같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정체기가 오게 마련. 그런 날 배려한 선배의 제안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남편 회사가 아주 바쁠 때였고, 둘째를 가질까 말까 고민을 할 때이기도 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곧 승진과 연결되는 거였는데 결국 또 그 선택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와 남편 때문에 생각해보겠다고 했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기도 하고.  


그 어렵다는 서울 아파트 청약에 당첨이 되었는데도 이것저것 따지다가 포기해서 청약권만 날린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었다. 그렇게 뭔가 기회가 주어지면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내 선택을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다. 항상 내가 감당할 만큼, 딱 그만큼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진짜로 실패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진짜로 성공했던 경험도 없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아야 할 30대를 치열한 성공도 쓰디쓴 패배도 맛보지 못한 채 보내버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 나만의 스토리가 뭘까 생각해본다. 8살 때 가족이 파산,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로 계속 정치에서 낙선만 했던 사람, 50대가 지나서 유일하게 단 한 번의 성공을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링컨이다. 수많은 실패를 견뎌냈기에 결국 최고가 될 수 있었던 링컨의 이야기를 듣고 전율하던 스물네살의 나는 없지만 50대가 지나서 무언가를 이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발견하는 나를 본다. 


언제까지 미래를 생각하다가 현재의 선택을 주저할 것인가.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기온이 너무 낮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과연 지금 내 인생의 온도는 몇 도일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 36도쯤일까.. 엄마는 뜨뜻미지근한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없다고 했는데. 


내 깜냥,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더 이상 그만하고 지금 내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더 세심하게 기울이자. 일단 내 마음의 첫번째 버튼을 누르자. 어쩌면 수습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할지도 모른다.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 진짜 커피를 마신 느낌을 맛보기 위해 오늘도 커피머신에 캡슐을 넣으며 생각한다. 내 삶의 온도를 높여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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