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은 더 잘 살고 싶어진다
슈퍼에 가보니 요즘 청포도가 꽤 싼 가격에 팔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도 포도를 좋아해서 포도는 좀 비싸더라도 덥석 사곤 한다. 그리고 보면 아버님 제사상에 빠뜨리지 않고 꼭 올리는 것도 바로 이 청포도다.
어렸을 적 남편이 바나나를 잘 먹더라는 어머님의 말 한마디에 그 비싼 바나나를 한 박스나 주문했다는 아버님은 통이 크고 호탕하신 분이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아버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자식,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낌이 없으셨는데 정작 본인을 위해서는 만원 한 장 쓰는 것도 손을 벌벌 떠셨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님은 정장을 자주 사셨는데 늘 동네 할인점에 가셔서 1-2만 원짜리 옷을 건졌다며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님이 우리 집에 오신 어느 날, 식탁 위에 무심하게 놓여 있던 그리 싱싱하지도 않은 청포도 한송이를 허겁지겁 잡수셨다. 이거 먹어도 되냐는 말도, 같이 먹자는 말도 없이. 나는 그날 아버님이 포도를 좋아하신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맥주도 이렇게 고개를 들 틈도 없이 드시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때가 아버님의 선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병원 정기진료 때마다 같이 동행하겠다는 어머님 손을 뿌리치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시던 분이셨다. 그렇게 총기 가득하신 분이 검진일이 아닌 날에 서울에 오기 시작하시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하시던 그때였다. 본인 몸 하나 가누기 힘드시면서도 손녀가 좋아한다고 동대문 문구거리를 헤매시며 몇 년간 안 사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스티커북을 배낭 한가득 무겁게 사 오시던 그때. 그때 그 시절 아버님의 모든 순간, 모든 말, 모든 행동들은 어느 하나 헛투루인 것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은 아예 서울 병원에 입원하셔서 투병 생활을 이어가셨다. 하나밖에 없는 손주이자 우리 첫째는 주말이면 놀이터가 아닌 아버님 병실에 가서 놀았다. 워낙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해서 병원에 가는 걸 그저 놀러 가는 일쯤으로 여겨 다행이었다. 병원에 함께 계시는 어르신들이 시키면 곧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잘 춰서 갈 때마다 용돈도 받고 간식도 많이 얻어먹었다.
항암으로 선망 증상이 계속되던 아버님은 본인 이름을 적는 란에 본인의 동생 이름을 적고, 간호사에게 계속 영어로 질문을 하시기도 했는데 손녀가 오는 날에는 이상하게 정신이 말짱해지시곤 하셨다. 움직이다가 다칠까 봐 가급적 몸을 움직이지 말라는 병원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병원에 방문하는 날에는 복도에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고 우기 시기도 했다. 본인이 스스로 드시지는 못해도 떠먹여 드리면 그 많은 밥 한 공기를 다 드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우리가 와서, 특히 손녀가 와서 그런 거라 하셨다.
매주 찾아오는 손녀의 예쁜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아버님은 더 힘을 내셨을 터였다. 병원 약은 아버님의 통증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기억을 조각조각 내고 피부 트러블을 만들며 온갖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뭣도 모르고 종알종알 거리는 아이의 존재는 아버님을 누구보다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098ㅅ9
"그래요.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인 것 같아요. 나도 당신 덕분에 버티고 있나 봐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아니,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 덕분에 버틴다니,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글자가 있었다.
애지 욕기생(愛之慾其生)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책 <언어의 온도> 중에서
단어 하나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는 날이 있다. 요즘 아침마다 필사하고 있는 책을 보다가 이 문장을 만났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뜻인 애지 욕기생이라는 글자가 오늘은 그냥 읽어지지가 않는다.
사람을 살아가게끔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누군가가 나를 응시해준다는 것, 나를 지켜봐 준다는 것,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것. 그게 그 힘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나 역시 살면서 순간순간 힘을 냈던 건 누군가가 걸어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어떤 이가 의도 없이 건넨 응원 한마디일 때도 있었고, 티브이 드라마 속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일 때도 있었다.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 오프닝 멘트, 길거리 어떤 가게 앞에 붙여놓은 손글씨, 열심히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누군가의 사진 한 장. 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것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꼭 표현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나를 바로 살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딸이 격리한다고 손수 만든 음식을 문 앞에 탑처럼 쌓아놓고 택배 배달원처럼 초인종만 누르고 가는 엄마, 평소 만나면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결혼식날 내 손에 장문의 편지를 꼮 쥐어주던 아빠, 엄마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며 강의를 준비할 때 아침은 내가 해주겠다며 고사리만 한 손으로 계란 스크램블을 해주던 딸. 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내 마음을 뜨겁게 했던 친구, 30년 넘는 세월 속에서도 늘 꼬맹이 시절처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는 은사님.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이 가진 모든 서사가 매 순간 내 삶에 대한 답이었다.
최근에 갑자기 살이 9킬로나 빠지고, 혈뇨가 보인다는 남편의 말에 내색은 안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결석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일상의 일희일비가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옆에 아빠라는 자리가 부재한다면 그건 좀 많이 슬플 것 같았다.
늘 돌아갈 때면 잘 가라는 말을 하시고 침대에 누우시던 아버님이 그날따라 병실을 나가는 5살 아이의 등 뒤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가 니 결혼식에는 못 간다. 알았나?"
딸아이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깡충깡충 뛰어나가는데 다른 가족들은 눈물을 흠뻑 쏟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란 그런 의미였다.
봄이 수명을 다하는 사이 저 멀리서 여름이 손을 흔들고 있다. (......)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절의 틈새를 건너가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책 <언어의 온도> 중에서
이제 곧 포도의 계절이 돌아온다. 봄과 여름, 그 계절의 틈새에서 주어진 하루를 묵묵하게, 겸손하게 살아가야 함을 느낀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하며 가슴 치는 순간에도 우리의 오늘은 알알이 익어가고 있다. 내일은 미소 지을 오늘, 한 달 뒤에는 분명 잘살았노라고 기억할 오늘, 누군가는 그토록 살고 싶었던 오늘, 누군가와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오늘일지도 모른다.
포도를 키우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한송이 한송이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끙끙거리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오늘의 한컷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기억하며 살아갈 힘을 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포도. 그 달콤 새콤한 과즙을 생각하면 쪽쪽 빨아 한송이를 얼른 해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야 한알 한 알 꼭꼭 씹어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평생을 가족, 제자, 주변 사람들을 위해 포도송이를 가꾸다 생의 끝자락을 향해 갈 무렵에서야 그 한송이를 마음껏 맛보신 아버님. 그런 아버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한알 한 알 꼭꼮 씹어먹는 편이 좋겠다.
그래도 슈퍼에 포도가 또 나오면 이번엔 가장 싱싱한 송이는 남편에게 양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