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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lbi Feb 23. 2022

좋은 애인


다음 주면 철수가 한국에 들어온다. 작년 7월에 함께 벨기에에 갔다가 나만 먼저 돌아온 지 7개월 만이다. 우리가 7년 동안 사귀면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낸 건 처음이다. 그러나 재회를 코앞에 두고 난 명랑하기보단 마음이 답답하고 고민스럽다.


철수는 그동안 빨리 돌아오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벨기에에 있는 게 점점 더 힘들다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그럴 때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불안감 같은 게 일었다.


‘돌아와서 더 힘들면 어쩌지?’  


철수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애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어떡하니, 철수가 돌아오면 네가 옆에서 잘 위로해 줘야겠다, 힘이 돼 줘야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이미 작년 여름 벨기에에서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6월 말, 한국에서 임종 소식을 들은 우리는 갑작스럽게 그의 가족이 있는 벨기에에 가게 됐다. 그땐 내가 당연히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해외에 간다는 건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난 애인이 아니라 여행사 직원처럼 굴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출발해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문제도 없어야 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못 갔으니, 적어도 약속한 날짜에는 철수를 가족에게 데려다 놓아야 했다. 그게 내 목표였다. 신경이 곤두선 채 잔여 백신을 뒤지고, 출입국 규제 사항을 읽고 또 읽고, 해외 출국용 PCR 검사를 받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가 바꿨다가 하며 전전긍긍했다.


그러는 동안 철수는 반쯤 넋이 나가 있거나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난 스트레스와 여름의 열기로 숨이 탁 막혔고, 출국 준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철수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어째서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되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걸까?


마침내 우리가 무사히 벨기에 땅에 내렸을 때, 그걸로 내 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철수의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을 텐데 난 임무를 달성한 사람처럼 거의 홀가분한 소감마저 들었다. 그런 내가 3주간 함께 벨기에에 머문다 한들 철수에게 한 줌의 위로라도 건넬 수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그랬듯 철수의 부모님 댁에서 지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40년 가까이 함께 산 집에 이젠 아버지와 개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와 지내면서 매일 밥을 차려 먹고, 축구 경기를 보고, 어머니의 묘지에 다녀오고, 주말이면 철수의 누나네 집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런 와중에 철수와 난 종종 부딪혔고, 그의 앞에서 여러 번 울었다. 철수가 “날 좀 이해해 줘”라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제발 이해해달라는 말 좀 그만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주가 채 안 됐을 때다. 정작 그가 내 앞에서 운 적은 없었다.


그때 나에게 슬픔에 잠긴 철수보다 내가 자처한 역할이 더 크고 중요했다는 게 이제 와 생각하면 기가 차다. 난 그가 더 기꺼이 고마워하길 바랐다. ‘좋은 애인’ 역할을 다하려고 내가 고생을 무릅쓰고 벨기에까지 왔다는 것, 그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철수의 슬픔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항상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3주 뒤, 나는 예정대로 혼자 귀국했다. 철수는 벨기에에 남아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고, 집을 팔았다. 그리고 노견 ‘스티키’와 아버지가 살기에 알맞은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철수는 그렇게 벨기에에서 몇 달을 더 지내다 지난 1월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3월이 목전인 이제야 돌아오게 된 건 날짜를 미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해가 바뀌자마자 심장 수술을 받았고, 끝내 깨어나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겨우 6개월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 후 스티키마저 맥을 잃더니 일주일 뒤 하늘나라에 갔다.


그래서 철수를 기다리면서 안타깝고 불안했다. 그가 겪고 있을 슬픔이 안타깝고, 과연 내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초조했다. 이번에도 그를 실망시키고 말 거란 불안이 날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내 불안과 죄책감에 대한 토로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깨달았다. 그런 충동에도 결국 나밖에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철수는 당연히 회복되지 않은 채 돌아올 거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돌아오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게 자기에게 좋다는 걸 본인이 아는데, 난 그를 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는다. 도대체 철수의 슬픔은 어디 있나?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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