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가 픽업트럭을 만든 이유 ②
미국 픽업트럭 시장은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소위 디트로이트 3사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통 강자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전체 시장의 80%가량을 과점하고 있습니다. 이들 빅3가 도요타와 닛산, 혼다를 합친 일본 3사보다 무려 3배 이상 높은 점유율을 갖고 있으며, 현대기아차는 아예 랭킹에 존재하지도 않을 정도로 철저히 미국적인 시장입니다. 심지어 포드 픽업트럭 F-150은 전 차종을 통틀어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모델이고, IHS Markit의 통계에 따르면 구매자의 42.9%가 다음 차량으로 F-150을 재구매할 정도로 충성도가 높습니다.
전기차가 픽업트럭 시장에 진입한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크게 바뀔 수 있을까요?
다수의 전기차 구매자들과 달리, 미국의 픽업트럭 소비자들은 환경 문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합리적인 가격으로 튼튼하고 잘 달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시장에서 테슬라 사이버트럭이라는 (그들 입장에서) 낯선 브랜드의 낯선 생김새 차량이 먹힐 수 있을까요?
사이버트럭이 시장에서 먹힐 수 있을지, 단도직입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물었습니다. 포드, 테슬라, 리비안, GM 4개 브랜드의 전기 픽업트럭을 두고, 선호도 조사를 진행했는데요. 결과는, ‘사이버트럭이 미국 디트로이트 3사를 꺾고 1위에 올랐다’는 만화 같은 대답을 기대한 우리의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GM이 29%로 선호도 1위를 기록했고, 포드가 27%로 2위였다. 사이버트럭은 20%로, 4개 차종 중 꼴찌였습니다. 심지어는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Rivian Automotive)의 R1T보다도 낮은 선호도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아직 출시되지 않은 차들이라 스펙이 동일하다고 가정했고, 내연기관이 아닌 전기차끼리 비교했다는 조사상의 한계는 있습니다)
왜 우리의 기대를 꺾고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소비자들이 GM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GM을 선택한 이들의 절대 다수(62%)가, ‘GM 브랜드를 선호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미 GM 픽업트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GM을 선택하겠다는 이들도 27%나 됐습니다. 성능이나 가격을 차치하고, 일단 GM이니까 사겠다는 겁니다. 포드를 택한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포드를 믿기 때문에 사겠다는 의견이 가장 큰 비중(54%)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설문 결과를 보면, 사이버트럭은 픽업트럭 시장의 보수적인 소비자 공략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21년 말 예정된 사이버트럭의 생산은 당장 취소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야하는 것일까요? 세단/SUV인 모델 S, 3, X, Y와 달리, 테슬라는 픽업트럭 시장에서 쓴맛을 보게 될까요?
설문 결과와 달리, 실제 사이버트럭 출시가 발표되고 난 뒤엔 예약 주문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예약 주문을 받기 시작한지 4일 만에 18만대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20년 4월 기준으로 예약 주문은 무려 60만 대나 쌓여 있습니다.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사이버트럭을 주문하면 '24, 25년까지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직 생산 설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이고 모델3처럼 생산 과정에서 난관을 맞닥뜨릴 수도 있어, 연간 생산량을 쉽사리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해에 누적 주문량의 1/4인 15만대만 소화한다고 가정해도, 단번에 업계 5,6위인 닛산이나 혼다를 뛰어넘게 됩니다. 소비자 선호도 꼴찌였던 사이버트럭이, 디트로이트 삼대장의 지위를 넘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분명 각종 언론에서 보도한 설문조사에서는 사이버트럭에 대한 불호가 지배적이었는데, 예약 주문까지 걸면서 열광한 60만 명은 도대체 누구란 말일까요?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응답자의 절반인 50%는 기존에 픽업트럭을 보유해본 적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보유 경험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픽업트럭 보유 유경험자들은 압도적으로 GM과 포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습니다. 이들 중 35%가 GM, 28%가 포드를 택했고, 오직 14%만이 테슬라를 골랐습니다.
하지만 픽업트럭 보유 경험이 없는 이들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 무경험자 사이에선 테슬라 사이버트럭이 근소한 차이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사이버트럭이 25.8%였고, 리비안이 24.8%, 포드와 GM이 각 24.7%로 뒤를 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이 사이버트럭을 선택한 이유로는, 좋은 성능(50%), 효율성과 오토파일럿 기능(33%)이 꼽혔습니다.
결론적으로, ‘픽업트럭’인 사이버트럭이 엉뚱하게도 ‘픽업트럭을 보유해본 적이 없는 이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습니. 실제로 사이버트럭을 예약 주문한 60만 명 역시, 기존의 픽업트럭 소비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이버트럭은 기존의 전통적인 소비자를 공략하는 데는 고전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시장 밖의 새로운 소비자를 픽업트럭 시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빅3의 파이를 빼앗아오기 보다, 이들과 전혀 다른 포지셔닝으로 시장 전체 파이를 키우는 데 성공한 겁니다.
물론 혹자는 이들을 일론 머스크의 비이성적인 팬보이들이라고 깎아내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가 600명이 아닌 60만 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이버트럭의 인기는 단순한 팬심에 머물지 않고, 픽업트럭 시장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Source
- Poll: Consumers prefer EV trucks from GM, Ford over Rivian, Tesla Cybertruck, but not by much (Autolist, 2019)
- U.S. Pickup Truck Market Up An Amazing 2% In Q1, Surprisingly (Seeking Alpha,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