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법칙과 Price Parity
2016년 3월, 테슬라는 보급형 세단 모델3를 공개하면서, 일론 머스크가 계획한 마스터 플랜의 세번째 조각을 완성합니다.
가장 기본형인 Standard 모델 기준으로 3만 5천 달러의 파격적인 가격으로 공개된 모델3는 공개 36시간 만에 사전 주문 27만6000대를 돌파했습니다. 그 전까지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전기차 닛산 리프의 판매량이 20만 대 내외였으니, 테슬라는 이틀도 채 안되는 시간 만에 이 기록을 단숨에 갱신한 겁니다.
모델3는 일론 머스크가 전기차의 대중화를 위해 세운 계획의 세번째 조각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데요. 누구나 살 수 있는 보급형 세단을 내놓기 위해, 럭셔리 스포츠카 로드스터부터 프리미엄 세단 모델 S, 그리고 프리미엄 SUV 모델 X까지 10여 년을 기다려온 결과물이 바로 모델3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모델3의 판매 기록이 아닙니다.
모델3는 자동차 업계 게임의 법칙을 바꿨습니다. 이제까지 자동차 업계의 전통적인 룰은, 매년 조금씩 개선된 성능의 자동차를 출시하고, 그만큼 조금씩 가격을 올려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은 제품에는 더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자동차 업계의 '게임의 법칙'이었습니다. 테슬라는 이러한 관행을 파괴하며 자동차업계에 새로운 룰을 제시합니다. 더 혁신적인 성능의 자동차를 더 저렴한 가격에 내놓은 겁니다.
앞서 소개한 2008년 출시된 로드스터는 10만 9천달러의 가격으로 최고 속도 200km/h, 최대 321km의 주행거리 성능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2019년 생산이 시작된 모델3 Standard Range 버전은 그 1/3의 놀라운 가격으로 동일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3만 5천 달러를 내고 최고 속력 209km/h까지 달리고 1회 충전으로 354km를 달릴 수 있으니, 오히려 성능이 조금 더 낫기까지 합니다. 물론 주행 속도와 거리만으로 자동차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기차의 핵심 성능 지표이자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주행 성능에서 압도적인 혁신을 이룬 것은 분명하고 놀라운 일이죠.
이는 흡사 IT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무어의 법칙’을 연상케 합니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으로, 다시 말하면 동일한 성능의 반도체를 2년 뒤 절반에 가까운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건데요. 반도체의 가격 대비 성능이 시간이 갈수록 향상되듯, 테슬라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나은 성능의 자동차를 내놓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해답은 배터리에 있습니다. 배터리 팩은 전기차 제조원가의 40-50%를 차지하며 완성차 성능과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부품입니다. 리튬이온 배터리팩의 가격은 2010년까지만 해도 $1,183/KWh에 달했지만, 이후 연 평균 약 19%씩 하락해 2020년 $135/KWh까지 낮아졌습니다. 업계에서는 이제 수 년 내로 전기차와 내연기관차의 원가가 이론상 동일해지는 $100/KWh, 이른바 Price Parity 지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수십 년 동안 자동차 소비자들을 망설이게 했던 전기차의 가격 열위가 사라지는 겁니다.
사실 리튬이온배터리는 근본적으로 원가 개선에 불리한 특성을 갖습니다.
배터리팩의 원가구조를 뜯어보면, 약 60%가량이 변동비인 재료비입니다. 변동비는 매출이 상승함에 따라 함께 상승하죠. 때문에 변동비의 비중이 클수록 매출 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수익성이 향상되는 규모의 경제를 누리기 어렵습니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부품의 재료비 비중이 25-50%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배터리는 생산 캐파를 확장해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 원가를 낮추는 데 분명한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셈이죠.
또한 배터리 재료의 핵심 소재인 코발트, 리튬같은 광물들은 세계적으로 극히 한정된 지역의 광산에서 수공업으로 채취됩니다. 때문에 수요 증대에 걸맞는 탄력적인 공급량 증대가 쉽지 않고 가격 변동도 매우 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터리팩의 가격($/KWh)이 연 20%씩 점진적으로 낮아질 수 있었던 혁신의 배경에는, $ 감소가 아닌 KWh 증대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재료를 더 싸게 살 수 없다면 이미 산 재료를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기술 발전이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가격 변동이 심하고 비싼 코발트의 배합을 줄이고 저렴한 물질로 대체한다든지, 천연 흑연에 인조 흑연을 첨가한다든지 하는 '레시피' 연구를 통해 리튬이온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술이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혁신적 발전이 이뤄지는건 아닐 겁니다. 리튬이온배터리에는 시장성이 있었기에 더 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고 더 많은 연구자금이 투입돼 이런 혁신이 가속화될 수 있었습니다. 전기차 시장이 점차 성장해 배터리 수요가 증가할 것이 충분히 예측됐기에 발전이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다.
이제 테슬라는 25,000 달러에 불과한 초저가 전기차의 출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더이상 전기차 구매에 있어 가격은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겁니다. 또 공급자인 자동차 제조사 입장에선 전기차가 더이상 수익성을 깎아먹는 애물단지로만 남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가속화될수록, 이를 미리 예측하고 "존버"하면서 주도한 일론 머스크가 새삼 대단해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Reference
- 테슬라 전기차 '모델3' 돌풍..."사흘만에 27만6000대 예약, 매출 13조" (조선비즈, 2016)
- Battery Pack Prices Fall As Market Ramps Up With Market Average At $156/kWh In 2019 (Bloomberg NEF, 2019)
- The cost components of a lithium ion battery (QNOVO,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