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조각 Oct 10. 2023

고양이와 헤어지는 중입니다(7)

슬픔의 언어

#18

그저 '슬퍼서 울었다.'는 문장으로는

그날의 감정을 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어들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감정들이

울컥울컥 역류하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동물병원에서 집에 온 후에도,

빨래를 널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눈두덩이가 빨갛게 붓고 코가 맹맹했다.

제법 얼굴이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경험이라는 것은 사건과 대상에 대한 감각과 지각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얻는 지식과 통찰이다.

즉 경험이 되기 위해선 시간의 간극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시체는 감각과 지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의 죽음으로만 죽음을 간접경험할 수 있다.


나의 인생에는 아직 죽음이 없었다.


'죽음이 없었다'는 말은 내가 사랑하고 깊은 감정을 나눈 사람들이 죽은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죽음을 모른다.


진숙이를 시작으로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하나씩

 '죽음에 빼앗기고 말 것'이란 두려움에 짓눌렸다.

죽음이 성큼 내 인생에 들어와 모든 걸 망쳐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19

병원에 다녀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인지 진숙이는 구석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여전히 생후 2달째의 아기 고양이 같은데 진숙이는 벌써 주어진 시간을 거의 다 살았다.

옆에 누워 진숙이가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걸까.

어떻게 너를 보내줘야 할까.

네가 떠난 후에도 견딜 수 있을까.


흐느끼는 소리가 진숙이의 잠을 깨울까 싶어 베란다로 나왔다.  


우리 가족은 종종 진숙이를 '우리 애'라고 부르곤 했다.


작은 몸집과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 아기 같은 진숙이의 울음소리.

진숙이는 우리 집의 막내딸이었고 '우리 애'였다.


그런데 14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

우리 애가 언제 이렇게 늙어버린 걸까.

여전히 작고 귀여운데 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애'라고 부르지 말 걸......

진숙이가 영원히 '우리 애'일 줄로만 알고......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그저 막막하여 소리 내어 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20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단다.

동물도 사람과 10년 이상 같이 살면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다.


진숙이는 '시한부 선고'의 뜻을 알기라도 한 모양일까?

갑자기 먹지도 마시지도 않더니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먹은 것도 없이 구토를 해 노란 위액을 쏟아냈다.


1년, 8개월,

점점 짧아지는 남은 시간들에 슬퍼했는데

그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진숙이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진숙이의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작은 몸에 무게가 줄었다.

껴안으니 앙상한 갈비뼈가 느껴졌다.

털에 윤기가 사라지고 수염이 축 늘어졌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진숙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수의사는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해 줬다.      


진숙이를 껴안고 속삭였다.


"아직은 안돼.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이렇게 가면 안 돼.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내가 널 보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마지막 말은 소리 내지 않았다.

진숙이가 알아들을까 봐.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와 헤어지는 중입니다.(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