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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시스 Jan 07. 2021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전공

자기설계전공을 통한 퍼스널 브랜딩

(전편에 이어)

환경정치론 수업으로 기후변화 분야에 확신을 얻고 난 뒤, 그 분야를 더 깊게 파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이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대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관련 전공으로 본격적인 석사 과정을 밟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으로 독학 및 대외활동으로 경험을 쌓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당시 나는 석사 계획도 없었거니와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당장 실행 가능한 후자를 택했지만, 이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본전공인 정치외교학 수업에 시간과 노력을 쏟기 다소 아까웠기 때문이다. 교수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사실 나는 더 이상 본전공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공 수업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어떻게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있겠어. 가끔 타협이 필요하기도 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원하는 공부만 할 수 있는 묘책이 있었다. 바로 자기설계전공 제도였다. 


내가 다닌 대학교에는 어느 전공이든 원하는 수업들을 한데 모아 자기만의 전공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스스로 설계한 전공에 이름까지 붙여 학교의 승인을 받은 후, 최소 이수학점 요건을 충족해 졸업하면 복수전공에 준하는 학사로 인정해주었다. 즉 졸업장에 본전공과 더불어 내가 직접 지은 설계전공 이름이 떡하니 찍히는 것이다!


앞서 설계전공을 경험한 동기의 도움을 받아 경영·경제학, 에너지시스템공학, 도시계획부동산학 등 여러 학과에서 듣고 싶은 강의 목록을 뽑았다. 환경정책론, 자원환경경제학, 심지어 환경윤리학까지 환경 관련된 수업은 몽땅 포함시켰고, 신재생에너지, 에너지와 환경 등 공대 수업도 일부 넣었다. 고심 끝에 '녹색에너지경영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름의 신청 사유와 함께 자기설계전공 신청서를 아래와 같이 작성했다.


스타트업 도전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현재 '신재생에너지 솔루션의 확산'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짓말쟁이 신세는 면했다


자기설계전공이 유효하려면 각 수업이 소속된 학과장의 승인이 필요했다. 자기설계전공을 신청한 뒤 가만히 앉아있으면 허송세월 하게 된다는 동기의 조언을 듣고, 나는 학과장님 한분 한분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승인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쌍화탕을 드리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멘트도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승인을 받았고, 이듬해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자기설계전공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자기설계전공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다.

1. 수업 듣는 것이 즐겁다 (수업 도중 졸음과 싸울 일이 없어진다)

2. 한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관련된 다른 수업과 연계해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조별 과제)

3. 다양한 학부 사람들을 만나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한 평생 문과인으로 살아온 내가 에너지 관련 공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긴 했다. 하지만 수업이 재밌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교수님을 붙잡고 물어보며 해결해가는 과정조차 즐길 수 있었다. 특히 핵분열과 핵융합의 반응식을 4시간 넘게 매달린 끝에 원리를 이해했을 때의 쾌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성적은 자연스레 올라갔고, 군대 가기 전 엉망이었던 학점은 졸업 즈음 충분히 복구되었다. 


핵반응식. 지금의 나에겐 외계어일 뿐...



자신이 뜻하는 진로가 명확하고, 그것이 학제 간을 넘나드는 지식을 요구할 때 자기설계전공은 학생들에게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전공을 직접 만들어 이수했다는 점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담할 수 있다. 녹색에너지경영학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전공은 첫 취업과 이직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했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 퍼스널 브랜딩의 관점에서 자기설계전공은 훌륭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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