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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숲 Jan 20. 2022

1. 퇴사 이후의 삶

나는 왜 퇴사했는가

 

퇴사 직전, 회사 건물의 옥상에서.

  퇴사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번듯한 직장이었고, 또 동시에 제게 과분한 직장이었습니다. 고졸의 스물세 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정직원이라는 타이틀은 꽤나 빛나는 물건이었습니다. 천만 영화가 개봉하면 너무 많은 업무들에 지쳐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알바 친구들은 수시로 사고를 쳤으며, 또 위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상사들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몸의 힘듦과는 별개로 저는 언제나 복닥거리는 영화관을 사랑했습니다. 영화관의 모든 것에 내 손길이 닿고, 내가 입장을 받은 관객들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출구로 쏟아져 나오는 그 과정을 사랑했어요. 그때는 '아, 영화관이라면 평생 일해도 질리지 않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가 찾아왔습니다. 문화산업에 있어 전염병은 큰 재난이었습니다. 알바 친구들을 순차적으로 내보냈습니다. 매표소와 매점의 빈자리는 정직원들이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서 있는 시간보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낯설었던 텅 빈 로비가 익숙해졌습니다. 하루 내내 관객이 10명도 들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매출이 몇만 원에 불과할 때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뎌지고 제가 사랑했던 일은 의미를 잃었습니다.


  차라리 서울에 가는 게 낫겠다. 서울은 그래도 이만큼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점장에게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서울로 보내달라고요. 지점장은 알았다고 했습니다. 발령을 내 줄텐데, 언제가 좋으냐 물었습니다. 7월이나 8월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조정이 어렵다면 한두 달 정돈 앞당겨져도 됩니다.


  그리고 지점장은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되어가는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무급휴직과 교대근무 스케줄이 영 맞지 않았습니다. 뭐, 그래도 내가 말한 7, 8월까진 세 달 남았으니까 조바심 내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너 XXX지점으로 가게 됐다. 발령일은 X월 X일이고."


  지점장이 전화로 통보했습니다. 발령일로부터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일자와 너무 다르지 않냐고 말했으나 이미 정해진 일자라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곧바로 사내 게시판에 인사이동 공고가 게재되었습니다. 회사가 나에 대한 최소한의 처우도 생각하지 않는구나, 이런 회사가 의미가 있을까, 내가 무슨 택배로 보내지는 소모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생각했습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회사가 기울어가는 것을 봐 왔습니다. 마치 뻘밭에 지은 빌딩처럼. 위태로운 회사에 남아 함께 무너지느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어린 지금에 발을 빼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느냐.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나는 가라앉는 배에서 가장 젊은 인력이었다. 경력이 5년이 되는, 하지만 고작 20대의 중위를 지나고 있을 뿐인 그런 인력. 나는 아직 젊었다. '젊다'라는 표현은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를 갖지만, 어쨌거나 나는 회사를 떠나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회사를 떠나야만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난파선에서 십여 년을 더 보낸 뒤 수장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땅을, 혹은 새로운 배를 찾고 싶었다. - 21.04.13

  

그렇게 21년 4월, 저의 '회사 밖에서 살아남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 INSTA : @soupsoup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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