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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숲 Jan 20. 2022

2. 퇴사 후 일주일의 변화

나태함을 뿌리치는 일은 힘들어

 

스무 살에 살았던 원룸 옥상에서.


  스무 살부터 끊임없이 일해왔습니다. 그래서 직장 밖에서 살아남는 일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지했습니다. 퇴사가 결정되기 전부터 '퇴사하면 뭘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긴 했지만 두리뭉실한 계획들 뿐이었습니다. 우선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부터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가진 것]

- 집 : 전세, 계약 1년 남음, 대출 1억, 쓰리룸

- 고양이 : 정말 귀여워

- 운전면허 : 작년 무급 휴직 기간에 땀

-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기본기 : 전단이나 배너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정도

- 서류 작성 기술 : PPT, 엑셀 깔쌈하게 사용할 줄 앎

- 금전 : 주식과 전세금으로 묶여있는 6천만 원 제외, 약 300만 원.

- 실업급여 : 회사가 부당한 조건의 장거리 발령을 지시했음을 증명해서 6개월간 실업급여 수급 가능하게 됨

- 나이 : 아직 아르바이트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될 정도의 나이

- 인스타그램 계정 : 팔로워 천명 정도

- 컴퓨터 : 사양은 그냥저냥


[가지지 못한 것]

- 직업 : 어디 가서 저 이거 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수입 요소가 없음

- 자격증 : 일본어 자격증, 운전면허 말곤 아무것도 없음

- 경력 : 진짜 영화관이 전부임


  취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실업급여를 받으며 프리랜서를 준비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회사생활이 적성에 맞았고, 또 사실 작년에 모 기업(IT업계)의 최종면접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서 취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해도 무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 적성에 맞았던 이유는 그 회사가 '영화관'이라는 특수직종이어서였다는 생각 역시 들었습니다. 그래, 프리랜서를 하자. 집에서 돈 벌어보자. 집 계약은 1년이 남았고, 실업급여를 6개월간 받으니까 분명 그동안에 무언가 준비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웬걸요, 갑자기 일 없이 쉬게 되니 몸이 나른해지고 잠이 많아졌습니다. 한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쉰 것 같아요. 고양이나 쓰다듬으면서, 가끔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주일째 되던 날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 굴러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있다간 실업급여 수급이 다 끝나고도 나태함을 버리지 못해서 퇴사를 후회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일단 가지지 못한 것 중 하나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GTQ의 포토샵 자격증을 따기로 했어요. 5월 시험을 접수하고, 무난하게 합격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게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 크몽 : 디자인 외주

- ETSY : 디지털 파일 판매

- 인스타그램 마케팅 : 인스타툰 활용


  크몽을 쭉 살펴보다가, 웹 사이트 제작 외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웹 사이트 만드는 걸 배워보자. 유튜브를 몇 가지 살펴보고, 또 도서관에서 웹 사이트 제작과 관련된 책들을 몇 권 빌려왔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책을 펴고 예제들을 하나씩 수행해나갔습니다.


그제야 삶이 굴러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배워두었던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확장성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면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중학교 때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배운 그 프로그램들이 없었다면 나는 내 세계를 더 크게 정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이르게 경험했던 회사에서의 시간도 유의미했다. 지난 6년간 나는 업무의 절차와 일반적인 회사의 구조에 대해 배웠고, 회사를 구성하는 인간 군상과 일반적인 직장인의 삶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삶에도 테크트리가 있다면 나는 일반적인 공략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꾸준히 견디고 겪으며 더 나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다. 무모한 성질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덕분이다. 노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얕게 뿌리를 내렸더라도 잎이 계속 번성하는 한 잡초는 죽지 않는다. -21.05.06



* INSTA : @soupsoup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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