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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숲 Apr 07. 2022

5.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요."

Y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Y는 제 남자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와 연인이 된 지는 2년에서 조금 더 지났어요. (제가 퇴사를 고민할 시점에는 Y와 1년 하고도 3개월 정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내가 더 이상 영화관 매니저가 아니라도 괜찮을까요? 여기에 있으면 사실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는 있어요. 그룹사의 복지혜택도 다 받아가면서, 별일 없는 한 승진도 계속하면서."

  "그게 숲 씨가 원하는 삶이라면 저는 상관없어요."

  "하지만 동시에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 없기도 해요. 본사에 가지 않으면 무언가에 전문화된 업무를 배울 수도 없고, 저는 지금 하는 업무들을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해야 해요. 물론 저는 이 일을 사랑하지만, 그런 삶의 방향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숲 씨는 아직 어리고(*대화 당시 저는 25살이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예요. 당장 회사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늦은 나이가 아닐 정도로. 많이 고민해보고 숲 씨가 원하는 삶을 살아요."


  Y는 언제나 제게 원하는 삶을 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언제나 존중과 존경을 표해왔어요. 이따금 우스갯소리로 '저는 매니저가 아니라 팝콘 순이에요. 영화관의 팝콘 요정이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팝콘을 튀길 수 있지!' 하고 자조하더라도 Y는 그 일마저도 대단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그리고 그 일을 사랑하는 제가 사랑스럽다면서요.

 



  일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일하는 영화관을 사랑했어요. 영화관의 매니저라는 위치는, 연봉이 아주 높거나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은 제게 정말 특별했어요. 그 공간의 특별함만으로도 몸의 고됨과 회사 안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모두 상쇄시킬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와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영사 직군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영화가 좋아서 이 일을 하게 됐대요. 근데 난 영화 별로 안 좋아해. 이번에 어벤저스도 안 봤잖아요. 기생충도 안 봤고. 난 영화보단 극장이라는 공간을 좋아해서 이 일을 하기로 했어요. 어렸을 때 영화관도 없는 곳에서 자랐거든. 살면서 처음 본 스크린 영화는 마을 문화센터에서 필름 영사기로 틀어주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었어요. 그 먼지 가득한 공간이랑 노이즈가 자글자글한 화면 아직도 기억나. 그리고 정말 특별한 날만, 가족들이랑 교외로 영화관에 찾아갔었어요. 한 4년에 한 번 정도. 나는 그때 느꼈던 낯섦이 좋았던 것 같아.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풍겨오는 단내, 조금의 소란스러움, 분주함, 반짝이는 사이니지, 크게 걸린 영화 포스터… 뭐 그런 것들. 그 이유로 처음 알바를 극장으로 정했던 거고, 거기서 극장이 더 특별해졌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 일을 아직 사랑해요. 극장은 패스트푸드 점이나 카페 하곤 조금 다른 낯선 특별함이 있으니까, 사람을 조금 설레게 만드는. 그런.
   내게 극장이 평생 낯설었으면 좋겠다. 금방 튀겨져 나오는 팝콘이 얼마나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지, 어두운 공간에서 화면을 쏘는 영사기가 얼마나 찬란한지 이따금 깨닫고 싶다. -19.07.05
  언젠가 Y가 물었다. 일이 즐거운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것이냐고. 극장이라는 공간 때문인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아니면 업무적인 성취감 때문인지. 나는 잠시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재보다가, 극장이라는 공간과 거기서 만나는 고객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여기서 하는 모든 일들은 장소가 바뀌면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극장은 특별하고, 그 특별함은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된다. 나는 그 특별함과 소중함을 만들어내는 구성원이고, 그래서 이 일이 즐거운 것 같다고. Y는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일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의외라고 이야기했다. 응, 일하는 사람들은 좋지만 일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좋아도 비즈니스적인 관계는 벗어나지 못해요. -19.11.06
  일이 너무 소중하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해. 이 작은 극장을 사랑해. 나는 남이나 당신을 위해 일을 그만둘 수 없어, 포기할 수 없어. 망설임 없이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이 일이, 나한테는 너무나 소중해. - 20.04.20


  그리고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을 하며 빛나던 제 모습은 점점 시들어갔습니다. 팬데믹 이후 영화관이 공간의 본질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었어요. 관객이 없는 영화관에선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회사 이야기를 해 볼까요? 회사에 불합리한 결정이 너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한 사항을 당장 이틀 후에 구현해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장에 9시간 동안 머무르면서 팝콘과 음료를 팔고 있는데. 파트타임 친구들 없이 현장의 모든 일들을 우리가 하는데. 더군다나 센터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평일에 회사 돈으로 골프나 치러 다니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회사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코로나 때문에 개인 생활도 자제하라며. 회식도 자제하고 타 지역 여행도 자제하라며. 그래서 집-직장 두 군데만 왔다 갔다 하는 나는, 당신들의 즐거운 골프 라운딩을 위해 하루 중 9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던 걸까. 그 라운딩이 이 회사에 어떠한 도움이 될까. 내가 가졌던 애사심은 어떠한 의미였던 걸까. 나는 애사심 하나로 그 모든 괴로운 업무들을 견뎌냈는데.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나는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20.07.19
  코로나가 1년 가까이 지속되며 우리는 지쳐갔다. 잠시 괜찮아지는 것처럼 보였을 때, 잠시 희망을 가졌을 때, 그때부터 코로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우리를 농락했다. 그것이 반복되며 이 회사는 이제 거의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수준이 됐다. 비록 여태껏 극장에서의 감염은 단 한 건도 없었으나, 그 이유가 대중이 극장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나는 가라앉는 배의 선원이고, 이곳은 언제 가라앉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이 배를 사랑했는데. 이 배에서 함께하는 이들을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같이 가라앉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밤. -20.11.28


  이 시기에 퇴사를 고민하던 제게 Y가 해주었던 말은 언제나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숲 씨가 원하는 삶을 살아요'라는 말. 평생 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는데, Y는 몇 번이고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Y의 눈에는 언제나 진심이 보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나 스스로가 원하는 삶의 형태를 살길 바란다고 느껴졌어요. 동시에 내가 지금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조금 불안정한 다른 삶을 살게 되더라도, Y는 끝까지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Y에겐 고마운 마음이에요. 


  Y가 보여준 그 무한한 신뢰에 힘입어 저는 여기까지 온 거겠지요. 퇴사 후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여전히 Y는 제가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내 여자, 역시 대단해!'라며 활짝 웃어 보입니다. 별것도 아닌 일들에 큰 힘을 실어주는 사람. 회사 밖의 삶에 당신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언제나 감사한 나의 Y.

  다른 방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Y에게 뽀뽀 한번 해주러 가야겠습니다.




+) 퇴사 후 느슨해진 하루에 불안해하는 저에게 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숲씨는 스무살 때 부터 지금까지 6년을 쉬지않고 일해왔어요. 대학에 방학이 있는 것 처럼 숲씨의 삶도 방학을 만든거에요. 그러니까 좀 쉬어요. 방학이라고 생각하고. 숲씨에겐 그럴 필요가 있고, 숲씨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에요."




* INSTA : @soupsoup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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