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관 Nov 23. 2024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달리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거리를 빠르게 뛰는 것도, 장거리를 뛰는 것도 좋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장거리를 택하겠다. 아직 10km를 넘긴 적은 없음에도 100m를 단숨에 주파하는 것보다는 하프, 더 나아가 풀코스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서로의 어릴 때 모습이 판박이처럼 닮은 것도 있지만, 생각과 움직이는 방식이 참 닮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 이런 성향 때문인지 나도 아빠처럼 걷기와 뛰기를 좋아한다.


아빠는 마라톤을 즐긴다. 내가 어릴 땐 자주  대회를 나갔고, 지금도 가끔 마라톤 대회를 나가며 거의 매일 아침 운동을 다녀온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학창 시절 체력장에서도, 군대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운동은 달리기였다. 아빠는 달릴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달리기를 할 때 아빠 생각이 참 많이 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포기하고 싶을 때면 나보다 30살이나 넘게 나이가 든 아빠도 10km를 뛰는데 한창 젊은 아들이 고작 3km도 못 뛸 순 없다 다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빠를 기폭제로 삼았지만, 점차 존경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묵묵히 자신만의 레이스를 완주하는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숨이 차고 지칠 때 힘을 냈다.


제대를 한 후, 한동안 달리기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하지만 서울로 오게 되면서 다시금 달리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화와 많은 혼란에 방황하던 어느 날, 문득 뛰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뛰기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변을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호흡과 생각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더 많이 걷고 뛰게 되었고 마라톤 대회 출전까지 꿈꾸게 되었다.


처음 10km 마라톤을 신청했을 때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는 거리를 완주할 수 있을지, 지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럴 때면 군대에서처럼 아빠가 앞에서 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아빠가 뛰고 있는 사진만 봤지, 한 번도 달리는 아빠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숨이 차오르고 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면 앞서 달리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의 기록보다 내가 더 빨리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아빠는 나의 앞에서 달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첫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달리기의 매력에 더 빠지게 되었다.


얼마 전, 춘천마라톤을 다녀왔다.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 대회는 아빠가 늘 로망이라고 얘기한 대회다. 아직 풀코스를 소화하기엔 한참 모자라 10km를 접수했지만, 아빠가 꿈에 그리던 곳에서 레이스를 한다는 자체로 즐거운 느낌이 들었다. 최근 달리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체력이 떨어졌음에도 활기찬 모습으로 레이스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절로 힘이 났다. 쌀쌀하게 느껴지던 요즘의 날씨도 왜인지 그날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번 레이스는 뭔가 특별했다. 늘 아빠의 뒤를 쫓아 달리던 나였는데, 이날은 달랐다. 옆에서 서로 북돋아주는 사람들의 호흡을 느끼며 힘에 부칠 때엔 다른 사람에게, 또 나 자신에게 힘을 내라고 연신 파이팅을 외쳤다. 오랜만의 레이스라 고단했지만 목표한 한 시간 안으로 레이스를 마친 뒤, 아빠에게 잘 뛰고 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는 답했다. 아빠의 로망을 이뤄줘서 고맙다고. 그제야 깨달았다. 늘 앞에서 달리던 아빠는 이제 내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그간 아빠의 뒷모습만 쫓던 나에게 보지 못했던 나만의 레이스가, 함께 호흡하며 달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마라톤은 아빠와 함께 뛰기로 했다. 상상 속에서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던 아빠가 진짜 나의 옆에서 달릴 때는 또 어떤 마음이 들까. 나의 달리기에는 언제나 아빠가 함께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