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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Feb 21. 2022

모든 삶은, 작고 크다

Feb 19, 2022

'비포 시리즈'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중 <슬래커>라는 작품이 있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독특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거리를 걷고 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날 뿐이다. 영화는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조명한다. 여기엔 히어로도 악당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사건도 없다.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의 삶이 있다.


가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유심히 본다. 어느 때는 그들이 살아온 삶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지하철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어르신의 굽은 등을  , 술에 취한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중년을  ,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손걸레로 훔치는 미화원의 주름진 손을  , 출근길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어린 회사원의 한쪽만 닳은 신발 굽을  . 나와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짐작하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는 연민 혹은 동질감 같은 감정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학창 시절,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새벽녘 수산시장에 가본다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어둠이 걷히기도 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묵묵히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삶에 대한 자신의 투정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깨닫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내 삶의 작음을 깨닫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긴다고, 그런 깨달음이 있어 삶의 현장이 크고 귀한 것이라고도 덧붙이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들을, 서른 중반이 되고 난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살아가고 있다. 살수록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부기.

제목은 루시드 폴의 동명 앨범명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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