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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작가 Mar 24. 2024

어느 날, 불안이 나를 찾아왔다

글.그림 김유미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의 경우는 제대로 보기도 전에 스포일러(Spoiler, 이하 스포)부터 찾는다. 〈오징어게임〉을 볼 때도 〈더 글로리〉를 볼 때도 그랬다. 456억은 누가 가지게 되는지, 우리 동은이가 또 당하지는 않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쫄깃함보다는 다음 장면을 예측하는 여유로움을 선호한다. 로맨스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둘의 사랑이 해피엔딩임을 확인하고 보는 것이 속 편하다. 내용 전개상 재미를 위해서 한두 편까지는 참고 보려고 하지만 주인공이 눈물이라도 흘리면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유튜브 리뷰에는 ‘스포주의, 결말 포함’이라는 제목과 함께 아직 시청 전이라면 조심하라는 느낌표가 가득하다. 막상 속 시원하게 결말을 알려 주는 리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드라마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내 인생의 결말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의 묘미라고 하지만, 그냥 좀 재미가 없어도 되니 미리 알고 싶다. 수년 뒤의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하다못해 이번 주에는 어떤 일들이 생길지 다음 회 예고라도 해준다면 잔뜩 긴장된 어깨가 조금은 풀린 채 지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의 일과는 대체로 이러하다. 어제와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오래된 동료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여 그림을 그린다. 일과 속에서 크고 작게 세워 둔 하루 계획이 이대로 진행되면 좋겠지만, 계획이란 생각보다 지켜지기 힘들다. 노력한다고 해도 계획을 방해하는 돌발변수가 많다. 갑자기 점심 미팅이 생겨서 낯선 이와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야근 혹은 회식하게 되어 그날 작업은 공칠 수도 있다. 가끔은 계획을 달성했을 때의 기쁨보다 달성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이 더 크다. 


 한때는 인생이라는 나의 드라마 전개가 느리고 반복되기만 해서 따분한 적도 있었다. 나조차 외면했던 시청률이 바닥인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어느 시의 아이처럼, 내일은 새로운 하루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밤마다 빌었었다. 그랬던 아이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어느 택시의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리던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의 의미를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옛날,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길 바라며
살아가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동화Fairy tale〉, 글로리아 밴더빌트(Gloria Vanderbilt)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더니, 직장생활에서는 웬만하지 않고서야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후배가 사고를 쳐도 상사가 급한 업무를 던져도 의연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넘치는 업무로 점심을 먹지 못해도, 갑자기 야근하게 되어도 즐기며 하는 여유도 생겼다. 이미 경험해 봤고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라 그럴 테다. 


 그렇게 찾은 여유 속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작가라는 또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림을 시작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 직장인으로는 베테랑이지만, 작가로는 다시 신입사원이다. 난생처음 겪는 일들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관객과 갤러리라는 낯선 관계가 생겨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 세계로 혼자서 들어가야 한다. 독립된 작가 생활을 위해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과도 서서히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바라던 삶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설레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대로 주저앉아서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살겠다고 징징거려도 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자꾸만 앞날에 집착하게 된다. 미래의 나에게 내가 얼마나 잘 해냈는지, 혹시 실패는 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해야 조금은 순탄하게 갈 수 있는지 등 힌트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누가 위로해주지〉, 72.7x60.6cm, oil on canvas, 2019, 김유미 작

 처음 겪는 일들이 주는 불확실함은 결국 불안으로 이어졌다. 생각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갔다.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맛이 나지 않았다. 익숙한 삶에 취해 있던 일상에 불쑥 찾아온 불안은 나를 조급하게 하고 외롭게 했다. 


 우리 뇌는, 질문을 하는 순간 그 사건에 꽂힌다고 한다. 핑크 코끼리를 떠올리고 난 뒤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핑크 코끼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왜 이렇게 불안할까?' 라고 질문하는 순간, 뇌는 그 이유를 찾느라 머릿속은 불안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뇌에는 질문을 다르게 던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럼, 바로 뇌는 ‘왜’가 아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챗GPT가 부럽지 않다. 


 내 평생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결국 스스로가 써 내려가는 일이기에, 신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의 스포는 직접 유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곧 반영될 시즌2 줄거리를 언급하자면, 나라는 주인공은 새로움에 도전하고 변화를 즐기는 캐릭터로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첫 장면은 장롱 면허증을 꺼내 들고 우당탕 운전 연수를 받는 컷으로 시작하고, 중간 전개쯤에서는 직접 운전하며 작업실로 출근하는 장면도 연출 계획이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출퇴근하는 장면 위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괜찮겠다. 스포를 유출했으니 허위·거짓 내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제 그만 불안의 코끼리는 지우고 핑크빛 오늘을 살아야 한다. 


 한참 핑크 코끼리와 지내고 있을 때 대기업을 관두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간 건축사이자 그림 선배를 만났다. 나도 이제 당신처럼 변화를 꿈꾸지만,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나도 불안해. 일을 관둘 때도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불안해. 우리는 누구나 불안해.” 그의 한마디는 아주 깊은 심호흡이 되었다. 남들도 그렇다는 것, 그 말인즉슨 나 자신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변화에 대한 막연함은 설렘으로, 조급함은 추진력으로 바꾸는 지혜를 더한다면 언젠가 조금은 특별해지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내일을 걱정하며 하루를 보내기엔 요즘 밤공기가 참 좋다.


김유미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큼 글짓기도 좋아한다. 온종일 그리고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쓴 책으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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