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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작가 Apr 07. 2024

여행의 반대말

글.그림 김유미

사실 내게 팬데믹 일상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코로나에 걸려 한 달 넘게 기침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목을 괴롭히고 있다. 회사가 어려워져 이직했고 미술시장에도 불황이 와 전시가 취소되는 등 크고 작은 불편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코로나19로 좋았던 건 어디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가기 싫은 모임이나 회식에 코로나만큼 좋은 핑계는 없었다.


 무엇보다 어딜 가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좋았다. 늘 휴가철이나 연휴가 되면 사람들은 물었다. “어디 안 가세요?” 대화를 위한 스몰토크 주제인 것을 알지만, 딱히 계획이 없다는 내게 여행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건 못해도 여행은 해야 한다며 여행 예찬론을 펼쳤다. 바빠서 가지 못한다고 적당히 둘러대어도 피할 수 없었다. 저마다 추천 코스가 있었고 그 추억을 가만히 들어야 했다. 팬데믹 세상에서는 여행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 덕분에 어디로 가야 한다는 은근한 강요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남몰래 선언한 적이 있다. 공식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마치 고양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싫어하진 않지만, 찾아 나설 만큼 관심이 있지는 않다. 모두가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속으로 생각만 하면 될 것을 굳이 선언까지 하냐, 하겠다. 왜 여행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시간이 없다는 둥 핑계 대도 말꼬리 잡히기 일쑤다. 인생에서 여행해야 하는 이유를 듣게 되고, 그 끝은 함께 떠나자고 한다. 거절이 어려운 나는 몇 번 제안에 응했다가 그것을 수습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인 셈이다.


 나도 한때 여행이 취미였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 때는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직장인이 되어서는 봄가을마다 더운 나라로 휴가를 떠났다. 이직하는 사이에는 유럽 여행을 수개월 하기도 했다. 틈만 나면 떠날 궁리를 했던 내가 여행을 멈추게 된 것은, 여행의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현실도피를 위해 떠나거나 때론 보여주려고, 남들이 하니깐 했던 해외여행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지난 유럽 여행 중의 일이었다. 그날의 모든 관광 일정을 마친 저녁쯤, 이제 제법 낯선 도시의 공기가 익숙해져서인지 여행의 감흥이 조금 식어 있었다. 검색하지 않고 아무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두고 바깥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재잘거리는 학생들, 벤치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커플,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가는 직장인. 나의 일상이었다. 이방인이 되어 바라본 특별한 시선이, 그저 보통의 하루를 사는 모습들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들었다. 정작 나의 하루는 그렇게 보지 못했을까?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언제나 줄이 긴 동네빵집이 있다. 그날은 줄을 서지 않고도 무화과 스콘을 살 수 있었다. 역시 난 운이 좋다. 평소 손이 작아 딱 먹을 것만 사는데, 기분 탓에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 양의 빵을 샀다. 약속은 없었지만, 오후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 행운을 나눠주고 싶었다. 물론 인증사진도 찍었다. 시간이 남아 집 앞 공원을 산책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 데이트하러 온 사람들 속의 내 모습이 추레해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때 친구가 빵을 주면 고기를 사주겠다고 동네로 오라고 했다. 친구네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봤다. 그 뒤로 펼쳐진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길게 펼쳐진 초록색으로 가득 찬 가로수와 파란 얼굴의 타요버스, 분홍과 주황빛이 어우러진 하늘에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나를 본 친구는, 집 앞이래도 옷이 그게 뭐냐고 사진을 찍었다. ‘꾸안꾸’라고 우기며 한껏 포즈를 잡지만, 예쁘게 찍어줄 리가 없다. 사진을 보고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여행지에서 했던 일들이 동네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굳이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어딘가로 떠나야 하나요/53.0x45.5cm/oil on canvas/2019, 김유미 작가

 ‘어딘가에 영원히 정착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리면서 의연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적당한 장소와 집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아 다닐 것이다.’라고 했던 모네는 43세에 미술 중심지 파리가 아닌 작은 시골에 정착했다. 그는 자기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하는 지베르니 정원을 가꾸며, 이제 여행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나도 모네처럼 나의 정원을 찾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이미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제야 모네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일상의 순간을 발견한 나는 의연하게 일하며 그리며,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간다.


 “휴가 다녀오셨어요?”, “우리 태국이라도 다녀올까?” 이렇게 코로나가 끝났음을 실감한다. 실은 나도 엉덩이가 들썩이긴 한다. 이직하고 3년을 꽉 채워 일을 하고 있으니 오래 참긴 했다. 내가 가지 않는 것과 가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를 벗고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다. 여행할 때면 인생 사진 남기는 것도 일이었는데, 역시 남는 건 사진이구나 싶다. 국제선 공항의 소리도 그립다. 무엇보다 수영장이 제일로 가고 싶다.


 이번 여름휴가에도 남들이 말하는 여행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여행보다 일상이 즐거운 탓도 있지만, 바쁜 일정이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올해 벌려 둔 일들을 무사히 끝내고 난 뒤 길게 휴가를 낼 생각이다. 오랜만의 일상탈출은 새로운 자극을 줄 테다. 다시 해외여행을 간다면 1순위로 가고 싶은 포르투일 수도, 2년 만에 찾는 제주도, 아니 제육볶음이 기가 막힌 외가댁이어도 좋겠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말한다. 여행의 반대말은 일상이라고. 내게 일상은 또 다른 의미의 여행이다.  이미 우리는 매 순간을 여행하며 살고 있다.


김유미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큼 글짓기도 좋아한다. 온종일 그리고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쓴 책으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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