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나

글을 통해 만나는 '나'의 이야기

by 류류류

상황과 사람은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같았다.

익숙하게 가슴 아리고, 예전과 같이 가슴이 조였으며, 비슷한 느낌으로 불안했고, 유사하게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꼈던, 과거의 경험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가장 최근에 느꼈던 감정들에서 아주 옛날,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나는 13년 동안 회사생활을 해오면서 시간도, 상황도, 그리고 물론 사람들도 달랐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은 비슷했다. 사실 한 층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감정의 핵심은 모두 동일했다.


정당하지 않다고 느낄 때 화가 올라오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 바보처럼 느껴질 때 올라오는 수치심, 너희는 무엇이 그렇게 잘났냐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억울함과 서러움. 그리고 하기 싫음에도 월급을 받기로 계약을 (아무리 내가 자발적으로 입사할 때는 기쁘게) 맺었음에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업무들 사이에 끼여있는 듯한 답답함.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 등.


많은 감정들 중에서도 최근에 내 얼굴을 붉히는 감정인 수치심에 대해서 좀 더 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사실 이 문장은 틀렸다. 내 안의 수치심이란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계속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실제보다 더 무섭게 계속해서 나와 동일시된 상태에서 나를 힘들게 할 것 같아 들여볼 수밖에 없었다는 문장이 더 진실과 가깝다.


'수치심'이란 감정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수치심: 자신의 존재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느끼는 불쾌한 감정. 부끄러움이나 창피함과는 달리, 자신의 본질적인 결함이나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는 깊은 감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거나 평가절하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함.


타인에게 안 좋게 평가되거나, 그럼으로써 거부당하게 되는 두려움을 느낄 때 동반되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불쾌한 감정을 뜻한다.


갑자기 예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의식레벨표가 생각이 났다.


이는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가 20여 년에 걸쳐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라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인데, 선과 악은 각기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 지도에는 1에서 1,000까지 수치를 가지고 있으며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인간의 의식 시점은 200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의식 수준이 200 이하일 때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그 이상일 때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증가했다.


여기서 가장 낮은 수치가 '수치심'이다.

그 뒤를 이어 죄의식, 무감정,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그리고 자만 순이었는데 모두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뒤에 따라오는 다른 감정들도 꽤 부정적이고 강한 느낌이었고, 사실 수치심보다 더 격렬하게 느껴지는 단어들이 많았는데 왜 수치심이 왜 가장 낮은 수치였을까,


아마 수치심은 인간 의식이 '존재'를 부정하는 수준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내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면 자살 충동이나 자기 파괴적 사고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에

내 자신을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감정인 수치심이 가장 낮은 의식 수준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삶을 억제하는 상태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단계라고 한다.


수치심보다는 분노, 욕망과 같은 감정이 더 격렬하게 느껴지는데 왜 더 높은 수치일까에 대한 물음은 여기서 중요한 건 감정의 강도(Intensity)가 아닌, 그 감정이 의식을 얼마나 확장 또는 축소시키는지를 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노(150)는 파괴적일 수 있지만, 무기력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단계로 분노가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욕망(125)도 집착이나 중독을 초래할 수 있지만, 무관심한 상태보다는 삶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움직임'을 동반할 수 있다. 반면 수치심(20)은 내가 잘못됐다는 감정이 아닌 '나의 존재는 잘못되었다'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어서 가장 치명적인 상태로 분류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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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100이 없다면, +100이 없는 것처럼, 부정적인 에너지와 감정이 없다면 긍정적인 에너지와 감정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뭔가 인간 존재의 수치심에 대해서 가장 밝은 의식 수준인 깨달음에 대비해 보았을 때, 뭔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기독교의 '원죄'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뭔가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거 같지만, 그러면 어떤가 글을 통해 만나게 될 내가 A4용지 한 장에 정리될 만큼 심플하고 명료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정리해 보았다.


1. 수치심 - 인간 의식의 최하단

의식 수준 20으로 가장 낮은 진동수이며, 인간 존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나는 가치가 없다” → 존재의 부정

자존감이 아닌 존재감 자체가 사라지는 상태

부끄러움과 다르게,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자기 파괴적 감정

흔히 유년기 학대, 집단 내 배척, 문화적 낙인에서 비롯됨


홉킨스는 수치심을 "의식이 생존하려는 의지도 상실한 상태"로 보며,

이 감정이 장기화되면 자살 충동, 극단적 자기혐오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함.


2. 깨달음 - 인간 의식의 최고단

의식지도에서 깨달음은 의식 수준 700~1,000으로 가장 높은 진동수


자아(ego)의 해체, 경계 없는 순수한 존재 상태

고통, 욕망, 죄책감, 수치심 등 이원성의 벗어남

일체감, 무조건적 사랑, 깊은 평화의 상태

예수, 부처, 라마나 마하리쉬, 성 프란체스코 등이 대표 인물

즉, 깨달음은 자아 자체가 사라지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끝에서 존재 그 자체와 하나 되는 경험


3. 그리스도의 원죄 개념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원죄 개념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죄는 우리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인류 공동의 타락'으로 보는 것이죠.

원죄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분리 상태에서 태어남

이 분리는 자아의 탄생, 고통의 시작

인간은 스스로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봄

중요한 건, 이 원죄가 단지 ‘도덕적 죄책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분리와 부정(= 수치심에 가까운 상태)을 의미한다는 점이에요.


이 세 개념을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다.


개념 설명 공통된 주제


수치심 (Shame) 존재에 대한 부정. 나는 잘못되었다. 자아의 왜곡된 자기 인식


깨달음 (Enlightenment)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 존재와 하나 됨. 자아 초월


원죄 (Original Sin) 하나님과 분리됨. 나약하고 타락한 자아의 상태. 분리된 자아의 고통



결국 위 세 가지는 결국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인식에서 시작하고,


수치심: 나는 부끄러운 존재다 → 자아에 갇힘

원죄: 나는 죄인이다 → 분리된 자아 인식

깨달음: 나는 자아가 아니다 → 자아의 해체


수치심은 우리가 가장 낮은 진동수에 있을 때 느끼는, 분리감의 정수라고 볼 수 있고

깨달음은 이 분리에서 아예 벗어나, 모든 존재와 하나임을 자각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인간이 원죄(즉 = 분리된 자아)에 빠져 있지만, 사랑과 믿음을 통해 본래의 자리(=하나 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수치심은 ‘내가 잘못된 존재’라는 깊은 자기부정이고,
원죄는 ‘신과의 분리’라는 존재론적 결핍이며,
깨달음은 이 모든 걸 넘어 ‘나는 존재 그 자체다’라는 궁극적 자각인 것이다.


내가 느낀 수치심 중에, 20대 이전에 겪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이 나는 3가지의 기억이 있다.


첫 번째 기억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와 친한 친구가 화장실에서 어떤 선배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선배가 못생겼다고 했었고 나도 그냥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 화장실에 그 선배의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녀는 내가 욕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우르르 끌고 와 쉬는 시간에 우리 반으로 와서 나를 둘러싸고 3,4명이서 나에게 욕을 막 하고 사라졌다. 그 후로 학교에 처음으로 가기 싫어지고, 머리카락도 빠지고, 괜찮은 척하면서 지냈지만 몇 달 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그때 나에게 욕을 했던 친구들은 나중에 같은 반이 되고, 나를 좋아해 장난도 치고 잘 지내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때 둘러싸여서 모든 반 아이들이 듣는 공간에서 욕을 먹은 것은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이상하게 글로 적으면 적을수록 좀 더 객관적이게 그때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왜 한 번도 적지 않았을까.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이걸 적기 전에 이걸 누가 보면,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주춤했었다. 15년도 지난 일인데, 그만큼 먼지를 털어 이 과거의 경험을 마주하는 것이 나에게는 거부감이 들었나 보다.


두 번째 기억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기억나는 처음 받은 상도 독서반딫불 상이 었다. 자연스럽게 중학교 때 내가 그때 키우던 강아지의 시점으로 소설을 써나갔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그냥 공책에다가 일기처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건데, 사물함에 넣어둔 그 공책을 어떤 친구가 발견했다. 기억하기로 이 친구는 우리 엄마가 반 친구들에게 줬던 선물에 대해서도, 내가 그렸던 그림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와 다른 한두 명이 그걸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하지 말라고 그 공책을 뺏으려고 했었고, 그렇게 몇 분 같았던 몇 초가 지나고 공책은 내 손에 다시 쥐어졌지만 나는 그 이후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나도 다 정리해 놓은 전자책 한 권을 플랫폼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남들이 보고 별로라고 생각할까 봐. 그때의 내 감정이 현재의 나까지도 꽉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세 번째 기억


내 최초의 기억이다. 4살 즈음되었을까. 차 두대정도 들어갈 정도의 골목길에서 나는 벌거벗은 채로 집으로 뛰어가고 있다.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옷이 젖어 그 친구의 엄마가 아주 작은 수건 하나를 어깨에 걸쳐주면서 집으로 뛰어가라고 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 그 골목길이 너무 길고 컸던 내 1인청 시점과, 먼 골목길 하늘에서 부끄러워하며 작은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집으로 뛰어가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바라보는 관찰자 시점이 엇갈린다.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은 벌거벗은 내 몸을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억이었다.



이런 기억들이 감정과 혼재되어 현재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전히.


칼 융의 분석 심리학에서,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이를 운명이라고 부른다는 주장이 있다.


즉 무의식적인 경험, 감정, 동기 등이 의식적인 자각 없이 삶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지금부터 글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감정들에 대해서 의식화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매듭을 풀듯.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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