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곱씹으며 음미하다
능력 있는 직장 여성, 그리고 직장 내 성희롱, 페미니즘, 미투, 이어지는 명예 훼손 소송, 퇴사, 제주도로의 이사, 카페, 우리나라 여성 사회의 화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어제 종영한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과연 윤진아는 페미니스트인가?
우선, 무엇이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스트인가? 나의 정의는 간단하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그래서 휴머니스트이다. 그 휴머니스트가 노동자라면 노동 운동가이고, 여성이라면 여성 운동가, 즉 페미니스트이다. 여성이 자신의 인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존재가 되고자 할 때, 그리고 그러한 각성을 방해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 극복해 나아가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여성은 페미니스트가 된다.
드라마의 시작에서 보여지는 윤진아의 정체성은 윤진아 스스로가 결정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딸, 회사에서는 성희롱까지도 '유연한 인간관계를 위하여' 감내하는 딸랑이였다. '착하다'라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능동적인 선택, 즉 그 선택을 통해 비난받을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권력자의 아바타, 노예라는 말에 불과하다. 우리가 어떨 때 '착하다', 혹은 '철들었다'는 말을 듣는지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상사와 조직의 결정에 토 달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어떠한 삽질이라도 해 낼 때, 불합리한 명령 - 후임 폭행에 가담하라는 등 - 에 눈을 감으면서 '모범적인' 군대 생활을 해 낼 때, 부모가 마음에 들어 하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나 뻔한 사람이라도 만나고 결혼할 때. 심지어 부모가 원하는 시기에 자식까지 낳아 기를 때 우리는 착하고 철 들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 '착한' 사람의 인생은 누가 설계한 것일까?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지 않는 사람이 노예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노예일까?
그런 그녀가 달라지는 최초의 계기는 바로 친구의 동생이자 훗날 연인이 되는 서준희와의 만남이다. 부모의 눈에 그가 기준 미달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부모가 이혼했다는 점, 그리고 직업과 학력이 준수하지만 훌륭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자, 이것이 그와 그녀가 만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윤진아와 서준희는 그러한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그 둘이 부모의 도움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한 부모가 그러한 이유로 반대하는 것을 감내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윤진아는 끊임없이 부모의 말도 안되는 몽니를 받아내고 원치 않는 선을 보기도 하며 서준희와 동거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바로 윤진아가 '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라마 속의 그녀를 마음껏 비난하지만, 나는 우리가 현실의 그녀 또한 그렇게 비난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 여부와 상관없이 부모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끝까지 배려하고, 결국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을 하고, 아무리 사랑해도 결혼 전 동거를 '미쳤다'라고 말하는 그녀가 당신의 딸, 누나, 친구, 직장 동료라면 그래도 비난할까? 오히려 철들은 선택했다고 칭찬하지 않을까?
윤진아의 선택은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그 수많은 성희롱을 알아서 감내하는 인내력, 사랑하는 사람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부모의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듣고 선까지 봐주는 그 인내력은 인내하지 않고 행동했을 때 자신에게 날아 들어올 돌멩이와 책임에 대한 두려움 - 실제로 윤진아가 오랜 시간 성희롱 폭로를 망설이는 이유 - 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자신의 어떠한 행동이라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변화한다. 오랜 고심 끝에 상사의 성희롱을 고발하고, 성희롱 가해자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소송까지 불사한다. 그 대가로 돌아온 '승진의 이름을 한 좌천'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성장은 '예전의 윤진아였으면 오늘이라도 너를 따라갔겠지만, 지금의 윤진아는 그러기에는 너무 컸어'라는 한마디의 말로 그 정점을 찍는다.
그러기에 이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이다.
윤진아는 다시 부모의 그늘에 숨어 위장된 평화에서 안식을 찾는 어린아이로 퇴행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서준희에게 가한 폭력보다는 서준희와 사회에게서 받은 피해를 강조하며 변명하기 바쁘다. 그런 그녀의 진심은 마지막에 가까운 순간 친구 금보라에게 토해내는 넋두리에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퇴사와 제주도행은 결국 자신의 자아를 처음으로 일깨워 줬으며 또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인 서준희, 그리고 유일하게 '착하지 않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 행동을 한 직장, 그 모두에게서부터의 도피일 뿐이었다.
과연 회피의 끝에 도달한 해피 엔딩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할 결말일까?
지금, 우리의 여성 운동은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해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진행되는 분홍색의 향연, 양보의 미덕, 착한 아이, 상냥한 미소, 여성스러움으로 대변되는 사회화가 만들어낸 작품이 윤진아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예성은 단 한 두 번의 자각으로는 깨어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끊임없는 퇴행과 회피, 무수한 실수를 동반한다. 그렇기에 지금 한국의 여성은 누구보다도 유능한 직장인이면서도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 친구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윤진아는 역대 최악의 민폐 캐릭터가 아니라 그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여자이다. 그녀의 양면성은 드라마의 그녀를 욕하며 현실의 그녀를 찬양하는 우리 자신의 양면성의 거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