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양 Sep 25. 2024

어느새 나는 온데간데없이.

무명배우여서, 퇴사합니다. 240925

나무는 찬바람을 맞고 견뎌야 할 것을 알고 있다.

얘들도 두려우려나? 그 자리에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늘 그 자리에서 있다.


조깅 중 길을 잘못 들어 그만 러닝쇼츠를 입은 상태로 네 시간에 걸친 험난한 산행까지 해버렸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잊어야 할 것을 두고 오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등산복이 없어도 괜찮은 나!


고객이 유독 없었던 오늘, 수요일.

그동안 인수인계로 바빴기에  막내 직원 언니와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수다를 나눴다.

웃고 떠들고 둘이 바짝 붙어 엉덩이를 맞댄 병아리처럼 소곤소곤 얘기하다가, 고객이 지나실 땐 한껏 조아린자세로 맞이 인사를 했다.

회사에 맘 기댈 곳 한 명 있다는 것이 어찌나 큰 동력이

되는지!


언니가 퇴근하고, 마감 중에 전화기 위에 붙은 비상연락망 스티커가 유난히 반짝여 보인다.

매장이 오픈할 때 내 손으로 만들어 붙여두었던 스티커가 붙어있던 자리다.

그곳엔 이제 자꾸 보아도 애틋한 나의 이름이 아닌 낯선 누군가의 이름이 빈칸 없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분이 이상하다. 꼭 내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게 꿈같아.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매장 곳곳 내손 닿은 것들이 눈에 뜨인다.

등 돌린 볼펜

사람들은 퇴사가 부럽다고 말하지만 나는 출근일이 얼마 남지 않아 괜히 애틋해지고 슬퍼진다. 비상연락망을 보고 있자니 나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인력일 뿐이지만, 이곳은 내게 교육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많은 것을 가르쳐준 것은 확실한데, 나 지금 혹시 벌써 그리운가?


인수인계를 진행하며 내가 매장 오픈한 그날부터 매장 관리와 그동안 바뀐 매니저님들의 근무 스타일에 따른 노하우 등을 정리해 둔 수첩을 자주 펼쳐서 알려주었는데, 이제 수첩의 앞장에 쓰인 내 이름은 두줄로 직직  그은 다음 막내 언니의 이름을 덮어썼다.

비로소 이 수첩은 자신의 필요성으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넌 얼마나 좋니? 그동안 일이 손에 익었다고, 다 알고 있다고 오만방자한 원래 주인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자주 펼쳐볼 새 주인이 나타났으니!


약해진다는 것은 슬퍼진다는 것일까?


오늘도 지하철에 피곤을 흘리며 퇴근 중.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김밥에 담긴 웃음 한 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