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계기가 되고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모두 상처가 많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겪었던 일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6살 때로 건너 올라가 보면, 유치원을 다녔던 것이 처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물건을 훔쳤는데, 저는 조용하다는 이유로 유치원 선생님들이 내가 범인일 거라며 몰아갔습니다. 다들 저를 잘 모르더라고요. 저는 말했어요. "저는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누군가 제가 훔친 것을 봤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은 저에게 말했어요. "빨리 내놔.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그러더니 제 손을 잡고 어느 반 제일 앞으로 데려가서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따라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내 손을 이제 올리더니 "저는 나쁜 아이입니다. 저랑 같이 놀지 마세요." 빨리 이렇게 따라 말하라고 실제로 훔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따라 말해야 했습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종종 듣잖아요. 이 일은 정말 큰 상처가 되어서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유치원에 나가지 않았는데요. 이때 엄마의 반응이 더 가슴 아팠어요. 훔쳤던 안 훔쳤던 유치원을 나가라고요. 저는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나는 피해자인데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거나 엄마조차도 훔쳤던 안 훔쳤던 상처를 받았던 안 받았던 위로를 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계속 말했어요. 내 마음은 어떤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안 물어보냐고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훔쳤으니 나쁜 아이라 다시는 나랑 놀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저에게 자존감을 긁는 행동이었는데도요. 누명 씌워지는 것은 누구나 기분 나쁜 것을 넘어 억울할 걸요?
이후에 우리가 이사 가면서 이제 엄마는 다시 유치원에 다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사람들이 무서웠어요. 어쩔 수 없이 가야 했고, 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예회를 할 때 엄마와 아빠는 저를 봐준 기억도 없어요. 단지 녹화된 비디오만 구입해서 한 번 보셨죠. 저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가족이 애들을 보러 오는 것이요. 저는 그렇게 혼자 집에 갔습니다. 이제 그러려니 한 과거의 일이지만 이 덕분에 혼자 해외를 가는데 두려움이 없었네요. 보통 떠날 때 힘든 것은 내가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저희 집은 훈육이 꽤 심했던 편이었어요. 밥을 안 먹겠다고 하면, 겨울에 홀딱 벗기고 밖으로 내쫓아 문을 잠가버렸는데 저는 그러면 문을 두들기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했죠. 틈만 나면 내쫓겼는데 그때 나는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훈육은 안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실 애가 없지만요!
한 번은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아저씨가 앉아있던 저에게 오더니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어른이 서있는데 뭐 하는 거냐고. 저는 그 당시 엄마가 옆에 앉으라고 해서 앉은 건데 앉자마자 그런 일이 있어서 엄마가 보호를 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엄마를 쳐다봤는데 엄마가 모르는 척을 하더라고요. 이 일도 사실 많이 큰 상처로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어요. 저는 펑펑 울면서 서 있었는데 엄마는 끝까지 저를 쳐다보지 않고 아저씨가 떠나고 나서야 왜 우냐면서 눈물을 닦아줬어요. 저는 이때부터 인생은 혼자고 내가 해결할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깨달았어요. 실제로 저희 부모님은 아무도 믿지 말아라 가족이라도 믿지 말아야 한다가 가르침이기는 해요.
6살에서 7살 어느 사이쯤 포클레인 교통사고로 저희 차는 완전히 깡통 캔처럼 찌그러졌는데,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빠는 어리니까 병원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저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이 아주 안 좋아요. 진짜 심각하게 아파요. 이 아픔이 영원히 가고 점점 안 좋아 지기만 할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 말이 사실 머리 안에 떠다니네요. 저는 사실 조금은 원망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말이에요. 정신적 아픔 말고도 신체적 아픔도 정말 힘들거든요.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로 땅만 보고 그냥 매 수업시간마다 울었다고 하더라고요.(그런데 운 기억이 이상하게 없어요. 기억 소실처럼 싹 사라졌어요. 선생님의 증언을 믿겠습니다.) 체육대회 때도 그 외 다른 축제 때도 부모님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어서 그때마다 운동장에 돗자리 깔고 가족들과 밥 먹는 것이 너무 부러워 보였어요. 저는 혼자 먹고 있는데 가끔씩 다른 가족이 혼자 먹는 저를 불러 왜 혼자 먹냐면서 같이 앉아 먹자고 했던 것이 너무 여전히 큰 감동입니다. 한 번은 외할머니가 오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유일한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이 온 날이었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식도 중학교 졸업식도 고등학교 졸업식도 저는 혼자였는데, 둘째 동생은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었어요. 그런데 둘째와 막내 졸업식은 가족이 다 축하하러 가주는데 질투가 엄청났던 기억이 나네요.
이제 너무 소심해져 저는 사람을 아주 더 더 멀리했어요. 입학한 학교의 친구들은 착해서 저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어요. 그 당시에는 왕따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도 있겠죠? 저는 결국 왕따가 되었어요. 친구들은 책상의 중간에 선을 긋고 팔이 넘어오면 때렸어요. 아무도 저에게 물건을 빌려주지 않았고 그냥 혼자였는데, 이유가 너무 조용해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존재를 모르는 친구도 좀 있었는데 공원에서 몇 년 후 만나도 전혀 저를 모르더라고요. 애들은 제가 쓰는 돈을 따라다녔고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말했어요. 이모도 저에게는 상처였는데, 저가 애 같지 않아서 싫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어른들은 애들한테 그런 말을 하나요?
집에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고 구두를 닦으면 3백 원 설거지하면 2백 원씩 받아 그것으로 용돈을 할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귀찮다고 부모님이 안 주셔서 그만뒀지만 그 일은 다른 애들의 용돈이 부럽기는 하게 한 기억이지만 나쁜 기억은 아닌 것 같아요. 이 덕분에 해외에서 거지가 되더라도 혼자 밖에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거든요.
저는 인생에서 40번이 넘는 이사를 했는데, 아마 아빠가 한 곳에서 오래 사는 것을 안 좋아하셔서 그런 것 같네요. 초본을 떼면 3장이 나와요. 제 생각엔 이 일도 저 정신적 충격에 한몫 더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아빠가 제 기억으론 27억 정도 사기를 당하게 되었는데요. 2학년 때 까지는 반포동에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연히 이사를 했고 아빠는 알코올에 의존이 심해지고 폭력도 심해지면서 집은 점점 풍비박산이 나고 있었어요. 보통 아빠는 처음엔 집안 물건들을 다 부시고 냉장고의 모든 음식을 다 꺼내고 갖다 던지고 정도였는데,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이후엔 엄마에게 협박하고 목을 조르고 뇌진탕을 입히는 것이 잦았어요. 이 안에서 저와 동생은 하루하루 불안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어요. 긴장을 놓는 법을 이젠 아예 모르겠어서 몸이 항상 굳어있고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빠른 상태로 현재까지도 살고 있어요.
이런 다양한 일이 있으신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 번 우물 밖으로 도전해보자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