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Lima)
로코부부(경열 오빠, 남지 언니)를 반년만에 만났던 날이었다. 로코부부는 멕시코의 한인민박에서 처음 만나, 한 달간 함께 살사댄스도 배우고 관광지도 다니다 서로의 여행을 위해 잠시 헤어졌었다. 이후, 우리 부부는 자전거로 중미를 달렸고, 로코부부는 배낭을 메고 남미를 여행했다. 원래는 반년 후 콜롬비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는데, 계획을 단단하게 세워놓고 하는 단기여행이 아니다 보니 재회장소가 예상에도 없던 페루 리마가 되었다.
대도시도 없고, 높은 건물도 보기 힘들던 중미에 있다가 페루 리마에 가니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볼거리는 왜 이리도 많고, 또 새로운 음식은 얼마나 많은지! 하루하루가 바쁘게 관광지를 둘러보러 다녔지만 딱 하나, 십자가 언덕 (San Cristobal 언덕) 만큼은 로코부부와 함께 가기로 미리 약속해 두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면 그 언덕 꼭대기에서 리마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우리가 리마에 도착하고 며칠 뒤, 로코부부도 칠레에서부터 날아왔다. 반년만에 다시 만난 로코부부. 멕시코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정이 듬뿍 들었는지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반갑다며 방방 뛰었더랬다. 우리가 묵고 있던 리마의 한인숙소 대문 앞에 서서 '잘 지냈니, 왜 이렇게 야위었니, 그동안 여행지는 어땠니' 등등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묻고 또 답했다.
한참의 이야기 끝에는 미리 약속했던 '언덕'이 있었다. 여기를 오르는 버스를 타려면 얼른 출발해야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다들 그 자리에서 자꾸 미적거렸다. 방금 화장실을 다녀온 나는 괜히 한 번 더 화장실이 다녀오고 싶었고, 한인 숙소에서 키우던 고양이 '꾸이'는 그날따라 더 귀여움을 떨어 우리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문제 되지 않던 남편의 머리는 갑자기 모두에게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남편의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을 가네 마네 하며 뭉그적뭉그적. 다들 고대했던 관광지였는데 이 날은 왜 그리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걸까. 결국은 일단 남편의 머리를 다듬자며 숙소 바로 앞 미용실로 들어가 남편의 머리를 싹 잘랐다. 흐흐.
그러고 나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내가 직접 걷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버스에 타고 가만히 앉아 언덕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너무 별로였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십자가 언덕이 어디를 가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관광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 길로 카페에 가서 밀린 수다를 열심히 떨고, 리마에서 가장 맛있다는 식당의 세비체(Ceviche, 페루의 전통음식으로 생선회를 갖은 양념과 레몬즙 등에 버무린 것)를 먹고 헤어졌다. 헤헷. 십자가 언덕 결국 못 갔지만 정말 좋은 날이었지 뭐야.
저녁이 다 되어 숙소로 돌아가니 같은 한인숙소에 머물고 있던 광현 오빠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나오며 우리를 맞이했다.
"너네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십자가 언덕 안 갔어?? 너네 괜찮아??"
뭔 소리여. 보다시피 우린 멀쩡한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광현 오빠가 우리에게 하루종일 연락이 안 되었다고 화를 내지를 않나, 옆에 있던 명실 언니는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고, 그 주위로 숙소의 다른 손님들도 우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이래들. 우선은 모두를 진정시키고서야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광현 오빠는 유튜브를 틀어 페루의 뉴스를 보여주었다. 알고 보니, 원래의 계획대로 우리가 바로 십자가 언덕으로 향했다면 분명 그 시간에 우리가 탔을, 바로 그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로 9명이나 죽었다고 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영상을 보니 정말 참혹했다. 투어버스이니 만큼 탑승자들은 모두 우리 같은 여행자들이었는데, 조금 더 좋은 풍경을 보고자 지붕이 뻥 뚫린 2층에 앉았던 사람이 많아 더더욱 사상자가 많은 것 같았다.
그저 머리를 자르고, 수다를 떨고, 저녁을 먹느라 미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해 연락이 안 되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모두를 걱정시키게 되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괜한 문제가 되었던 남편의 머리가, 우리의 반가움이, 밀린 수다가 우리를 살렸다는 생각에 온몸이 움찔움찔 했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일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곧장 언덕으로 갔을 거고 바로 저 사고 버스를 탔을 거였다. 정말이지, 우리가 계획적인 사람들이고 게으르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지 모를 일이다. 너무나도 운이 좋았다.
느릿느릿한 자전거 여행 1년. 하루쯤은 관광버스를 타보겠다던 의지와, 또 하루쯤은 미뤄보자던 게으름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한 게으름이 우리를 살렸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가 게을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