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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렐라 Jan 12. 2019

페루를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의 일기

페루, 쿠스코(Cusco)에서 푸노(Puno) 가는 길

2017년 8월 1일, 페루 쿠스코에서 푸노로 가는 길.


아침에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한참을 깨워서야 겨우 눈을 떴다. 밤새 얼마나 추웠는지, 입이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침낭에서 나오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남편도 어지간히 추웠나 보다. 8월, 아무리 남미의 겨울이라지만, 그리고 이 곳이 해발고도 4000m가 넘는다지만 추워도 추워도 너무나 춥다. 입김이 하-하 나오는 이 곳. 어제 분명 있는 옷을 다 껴입고 마스크까지 한 채로 침낭 안에 쏙 들어가 잤는데도 너무 추워서 새벽에 몇 번이고 깼다. 게다가 이 곳을 돌아다니던, 어제 좀 예뻐해 주었던 강아지가 새벽 내내 우리를 지킨답시고 텐트 옆에 자리 잡고는 누가 지나가기만 해도 짖어대었다. 추워서 깨고, 강아지 짖는 소리에 깨고, 한 달째 고산병인지 코피를 흘리다 깨고, 코피에 숨이 막혀 또 깨고. 잔 건지 안 잔 건지 알 수 없는 아침이 밝았다.


어쨌든 툴툴거릴 시간이 없다. 얼른 일어나서 텐트 안을 정리하고, 정신을 차리는 동안 어느새 남편이 아침을 뚝딱 만들어왔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미소국과 참치 한 캔. 미소국을 팔팔 끓여 어제 저녁에 남았던 밥을 말았다. 뜨끈한 국물을 입에 넣으니 이제 좀 몸이 따뜻해진다.


마스크를 뒤집어 써도 추운 이 곳, 아침의 따뜻한 국물

아침도 먹고, 텐트 안에 앉아 매트와 침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남편이 사라지고 없다. 어디 갔나 보니 자전거에서 뒷바퀴를 떼내고 있다. 아휴, 또 펑크가 났나 보다. 어제도, 그제도 매일같이 튜브를 갈아 끼우고 있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튜브 사이즈가 타이어에 잘 안 맞아서 그런지, 펑크가 매일이다. 왜 세상에는 펑크 나지 않는 튜브가 없는 것인가!!!


새로운 튜브도 껴 넣고 자전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온천을 나섰다. 어제 해발 3400m 지점부터 오르기 시작해 600m를 올라, 고도 4000m의 온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페루의 고산지대 한가운데 자리한 온천이라니! 별 기대 안 하고 들어왔던 곳인데 꿉꿉한 달걀 썩은 내가 코를 찌르는, 제대로 된 유황온천이었다. 입장료도 겨우 5 솔(약 2000원)밖에 안 하는데, 하룻밤 캠핑을 해도 괜찮단다. 밤이면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지는, 추운 이 곳에서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싹 사라졌다.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 이 고산지대에서 어마어마한 오르막을 맛보고 지칠 대로 지쳐있던 우리였다. 물론 오늘도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을 올라야 하지만, 오늘은 딱 300m만 오르고 그 다음부터는 쭉 내리막이니까 아주 약간, 야-악간 힘이 난다. 보기에는 평지 같아 보이는데 막상 달려보면 오르막이라 약이 바짝바짝 오르는 길. 아무리 오르막을 매일 올라도 내 다리는 적응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 높고 높은 고산지대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와, 고산지대의 달리는 숨을 부여잡고 페달을 밟다가, 내려서 헉헉거리며 끌다가를 반복했다.


한참을 달리다 난데없이 톨게이트를 만났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우릴 보더니 친절하게 갓길로 지나가라고 안내해주는 아저씨. 아저씨에게 꾸벅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왼편에, 저 넓은 들판에 뭔지 모를 동물이 잔뜩 돌아다닌다. 가까이 가 보니 세상에, 알파카였다!! 쿠스코에서도 몇 번 봤던 알파카였지만, 떼로 있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알파카를 선택할 거다. 오르막에 지치고, 숨찬 고산에 지칠 때도 어김없이 힘이 되어주는 알파카.


저기 좀 봐!!! 알파카야!!
알파카
알파카 알파카
알파카 알파카 알파카!!!!!!!!!


한참 또 오르다 다시 한번 알파카 떼를 만났다. 이번에는 까만 알파카, 고동색 알파카, 하얀 알파카 등 색색이 화려한 알파카 떼다. 고 귀여운 얼굴을 제대로 찍고 싶어 소리도 질러보고, '알파카야~' 하고 불러도 보고, 휘파람도 불어 보지만 얼굴 한 번 돌려 주지 않는 매정한 알파카들. 그저 질겅질겅 풀 씹는 데에 열중해 있을 뿐이다. 길에 자전거를 내려놓고 한참을 서서 그 귀여운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어제는 끝도 없는 오르막에 꽤나 지쳤었는데, 오늘은 볼거리가 풍성하니 조금 더 힘이 난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숨 크게 들이쉬어가며 살금살금 페달을 밟았다. 고산이 아닌 곳에서야 오르막을 오르다 힘들면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면 됐는데, 이 곳에서는 어쩐지 걷는 게 더 힘들다. 산소의 중요성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는 이 곳, 원래는 이 길로 갈 계획이 아니었다. 리마에서 출발해 나스카(Nazca)에 있던 우리, 그 길 그대로 쭉 해변을 따라 달려 볼리비아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전 발생한 지진 때문에 산사태가 나서 원래 계획했던 길이 막혀버렸고, 복구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몰라 결국 이 길을 선택해야 했다. 부족한 산소에 헐떡거리며 이 길을 후회하기도, 또 알파카를 보며 잘했다고 생각하기도, 널을 뛰는 내 기분을 붙잡고 오르막을 계속해 올랐다.


4335m,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높은 정상에 도착했다. 내 자전거로, 내 두 다리로 고도 4335m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높은 곳에 직접 올라왔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앞으로는 내리막이 쭉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기쁘기도 했다. 이런 우리를 축하해주기라도 하듯 이 꼭대기에 알파카 한 마리가 줄에 매여있다. 아마도 주인이 있는 아이인지, 사람을 봐도 경계심도 없이 잘 다가와준다. 인사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고 복슬복슬한 털을 느껴보기도 하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잘 놀아주는 걸 보더니 남편도 옆으로 다가와 알파카에게 손을 건네보지만,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리는 이놈. 괜히 다가갔다가 상처만 받은 남편은 흐흐흐, 하고 웃어버렸다. 


우리를 맞이해 주었던 귀여운 알파카


가장 꼭대기였던 4335m 지점을 지나자 신나는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이게 며칠 만에 만나보는 내리막인지! 3일 동안 겨우 오른 걸 한 시간도 안 되어 다 내려왔지만, 이 재미로 다들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것 아닐까. 30분쯤 환호성을 지르며 내려가다가 너무 한 방에 내려가기는 아까워서 일부러 멈췄다. 잠시 중간에 앉아 점심으로 또띠아에 삶은 소시지를 말아 우적우적 먹고, 금세 다시 자전거 안장에 올라 내리막의 짜릿함을 맛봤다. 이런 내리막만 나와주면 자전거 여행의 모든 순간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오르막이 있어야만 내려갈 수도 있다는 걸 매분 깨닫는다.


신난다 내리막!


짧게만 느껴졌던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에 접어들었다. 어느덧 오후 세시, 다음 마을까지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많이 남아 오늘도 영락없이 캠핑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시골에 캠핑장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길가를 지나다니는 차나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없을 법한 곳에 텐트를 쳐야 하는데 사방이 뻥 뚫린 이 곳에 그런 곳이 보이지 않는다. 페루의 겨울, 해가 짧아 5시면 어둑어둑해지는데 그전에 텐트를 치고 저녁도 해 먹어야 했다. 페달을 밟으면서도 이리저리 잘 곳만 찾아 헤매는데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해는 자꾸만 지평선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림자는 점점 길어진다. 이제 더 이상 못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길이 힘든 것도 아니지만 정말 기어가듯 기어를 가장 가볍게 놓고 엉금엉금 가며 텐트칠 곳을 찾아 헤맸다. 어지간한 곳에 대충 치고 자려고 했는데, 정말 어지간한 곳이 안 나온다. 왜 이렇게 뭐가 없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는 남편의 목소리를 위안삼아 자전거를 굴렸다.


"어!!"

뭔가를 발견했는지, 남편이 길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평지 안으로 스윽스윽 걸어 들어갔다. 텐트를 칠 만한 장소이기를 바라며 남편을 한참 쳐다보았다. 저 멀리에 흙무더기 같은 것이 보였다. 때마침 그 뒤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온 남편이 날 바라보며 텐트를 쳐도 좋을 것 같으니 이쪽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물가도 없고, 마을도 없지만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히, 오늘 밤도 잘 곳을 찾았다.


저 흙더미 뒤가 오늘의 캠핑장

흙더미 뒤쪽으로 도로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게 텐트를 치고, 자전거도 잘 묶어두었다. 아까 오는 길에 농가의 아줌마에게 부탁해 얻었던 물을 콸콸부어 파스타면을 익히고, 소시지와 양파를 볶았다. 양념도 없이, 소금과 후추만을 곁들여 매일같이 먹는 파스타지만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탄 후 지친 상태에서 먹는 이 저녁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여태까지 보지 않고 아껴두었던 신서유기를 틀었다. 하필 오늘의 내용이 1650m의 고산지대 사파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해발 3900m의 텐트 안에 누워 이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오묘하다.


아까 물을 얻은 덕분에 여유가 좀 있다. 저녁 먹은 그릇을 설거지도 하고,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했다. 내일쯤이면 마을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와일드 캠핑은 그만하고 내일은 꼭 지붕도 있고 샤워시설도 있는 숙박시설에 들어가서 자고 싶다. 빨래도 하고, 밥도 꼭 사 먹고, 물도 벌컥벌컥 마셔야지. 별 것 아닌 일상의 모습이 내일의 목표가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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