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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렐라 Dec 30. 2018

로레알 로션

칠레, 파타고니아 : 파라과이의 아련한 기억

2017년 11월의 마지막 날. 칠레의 파타고니아를 달리고 있는 요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중간중간 만나는 각국의 자전거 여행자들과 인사하고, 캠핑을 즐기다 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가버렸는지... 오늘도 텐트를 치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텐트로 돌아와 로션을 꺼내 들었다. '툭툭-'. 시간이 벌써 한참 지났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무리 병을 쳐 봐도 로션이 한 방울도 나오질 않는다. 이제 새 걸 꺼내야 되겠군.


내 프런트 패니어를 한참 뒤적여 바닥에 깔려있던, 새 로션을 꺼냈다. 로레알에서 만든 로션으로, 수분 보충에 뛰어난지 용기 겉면에 'Hidra-' 로 시작하는 스페인어가 적혀있다. 이걸 어디서 샀더라, 맞아, 파라과이였지. 처음 남미에 발을 들일 때는 전혀 계획에도 없던 곳이었다. 페루, 볼리비아를 지나 곧장 아르헨티나로 들어가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발을 들이게 됐던 파라과이. 물가가 싸고, 한식이 맛있고, 모든 게 다 좋다는 로코부부의 강력한 추천에, ‘한번 가보지 뭐’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들어갔던 파라과이.


듣던대로 모든 게 사랑스러웠던 파라과이였다. 덥고, 모기도 많았지만 그 어디에서 느낀 것보다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친절함이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면 시원한 얼음물을 건네주고, 자전거를 타다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멀리서부터 달려와 괜찮냐고 묻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물가는 매우 저렴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특히 한식이!), 모든 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던 나라였다. 정말이지 이런 나라라면 몇 달이고 더 있고 싶었는데, 일정 때문에 겨우 한 달밖에 머무를 수 없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축구장에서 하루 캠핑하고 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던 파라과이 사람들
덥고 덥던 파라과이 라이딩


'시우다드 델 에스떼(Ciudad del Este)'라는 파라과이의 마지막 도시에서 브라질로 넘어가는 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파라과이 돈을 소진하기 위해 들렀던 마트에서는 심지어 눈물을 글썽거리던 나. 내 사랑 파라과이, 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대형마트에서 혼자 온갖 감성에 휩싸인 채 남은 돈을 계산해가며 필요한 걸 하나하나 골랐다. 간식거리, 점심으로 먹을 엠빠나다(Empanada), 샴푸 등을 고르다 로션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기억해내고 로션을 찾았다. 로레알에서 만든 로션이 눈에 띄었다. ‘헤어제품으로 유명한 회사지만, 분명 로션도 잘 만들 거야, 가격도 괜찮네’라는 생각을 하며 냄새도 맡아보고 신중하게 장바구니에 넣었었다.


패니어에서 새 로션을 꺼내 들어 바르려니 파라과이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정말 좋았었지.. 감상에 젖어 로션을 짜 얼굴에 톡톡 발랐다. 아, 냄새도 너무 좋고, 엄청 부드럽네, 하며 남편 얼굴에도 몇 방울 찍어발라줄 생각이었다. 다 쓰면 이거 또 사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뒷면을 봤다. 어느 단계에서 어떤 제품과 함께 사용하면 좋은지가 쓰여 있었다. 


이것이, 그 로레알 로션


1단계. Limpiar (씻을 때) : Desmaquillante Equilibrante(제품명)

2단계. ...


응?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제품 이름이 저 Desmaqui 어쩌고 저거 아닌가? 씻을 때 쓴다고? 내 눈을 의심하며 한번 더 씻을 때 사용하는 제품의 이름과,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제품의 이름을 하나하나 비교해봤다. 이 제품이 틀림없었다. 잠시 패닉에 휩싸여 'Desmaquillarse'라는 스페인어를 검색해봤다. ‘화장을 지우다’라는 뜻이 나와있었다. 씻는다, 뒤에는 '솜과 함께 사용하면 더 좋습니다'라는 설명이 친절하게 한 문장 더 덧붙어져 있었다. 아놔 이런 우라질 젠장... 로션은 무슨, 메이크업 리무버를 산 것이 아닌가. 그걸 또 부드럽고 좋다며 내 얼굴에 이미 쳐덕쳐덕 발라놨지 뭔가.


파라과이를 생각하며 그때의 좋았던 기분과,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있었는데 삽질도 이런 삽질이 없다. 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쌍큼한 삽질의 기분. 남편은 날 보고 깔깔거리며 웃고 난리가 났다. 다시 세수를 하러 텐트 밖으로 나가는 길, 다시 한번 파라과이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메이크업 리무버를 선물(?)한 내 사랑 파라과이. 매일같이 환상으로 한 겹 한 겹 덧씌워지고 있던 파라과이의 아련한 기억에 메이크업 리무버 로션이 덧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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