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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Jul 04. 2024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간다, 방약무인(傍若無人)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자객열전(刺客列傳) 형가(荊軻) 이야기

너희들에게 일곱 번째로 들려주고 싶은 고사성어는 방약무인이라는 말이야. 곁 방(傍), 같을 약(若), 없을 무(無), 사람 인(人)으로 이루어진 말이지. 곁에(傍) 사람(人)이 아무도 없는(無) 것처럼(若) 행동한다는 뜻이지. 오늘날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 이야기에서는 지금의 쓰임과는 많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 형가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刺客, 요즘 말로 하면 킬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성어로,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함의 의미가 더 강해. 고사성어 중에는 이야기 속 원래 의미와는 달리 한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방약무인이라는 고사성어도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지. 이 고사성어를 이번 이야기로 꺼낸 것은 형가가 보여주었던 당당한 자아,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던 태도를 전해주고 싶어서야. 우리가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뭘까?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을 존중하고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정신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딸들이 형가의 삶에서 세평에 굴하지 않는 마음을 배우길 바라며 방약무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해. 


전국시대


형가가 등장한 시대는 이제 전국 시대가 마무리되어 가던 시기야.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이때쯤 되면 7개의 나라만 남아서 마지막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 진, 조, 위, 한, 초, 연, 제가 그 나라들이야. 이 나라들을 전국 시대의 일곱 영웅 나라,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해. 그중에서도 서쪽의 진나라가 법가 사상을 받아들여 가장 강력한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고 있었지. 전국시대 후기에 가면 진나라의 힘이 굉장히 강해져서 다른 나라들은 진나라를 막는데 급급한 상황이 되어버려. 사실 전국칠웅이 정해진 다음은 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차례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진나라는 가깝고 약한 나라부터 정복하기 시작해서 한, 조, 위, 초, 연, 제를 차례로 무너뜨렸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형가가 살던 곳은 연나라였어. 원래는 위나라 사람이고 조상은 제나라 사람이라는데 왜 연나라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 다만 고향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삶이 평탄치 않았다고 짐작할 수는 있어. 삶의 뿌리를 옮기기 힘들었던 고대이기 때문에 더 그렇지. 그럼에도 형가는 자기 발전을 위해 힘쓴 사람이었나 봐. 책읽기도 좋아하고 격투기와 검술도 좋아했다니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던 셈이지. 그렇게 실력을 쌓은 형가는 위나라 왕에게 유세(遊說)했어. 하지만 위나라 왕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지. 결국 형가는 벼슬 없이 유협(遊俠)의 삶을 살았던 것 같아. 유협이란 떠돌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지.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될까?

연나라는 지금의 베이징(북경) 일대라고 생각하면 편해. 그래서 북경의 옛 이름이 연경이고, 우리 조선 사신들이 북경을 갈 때, 흔히 연경을 간다고 해서 ‘연행’이라고 했지.


고점리, 전광과 형가


유협이긴 해도 형가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어. 함부로 싸움에 말려들거나 목숨을 걸지 않았으니까. 하루는 유차라는 동네를 지날 때 개섭이라는 사람과 검술을 이야기하다가 언쟁을 벌이게 되었어. 개섭이 화를 내면서 형가를 노려보았지. 이 유협의 세계에서 화를 내며 노려본다는 것은 승부를 내자는 이야기였어. 왜 지금도 누가 노려보면 싸움을 거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과 같지. 그런데 형가는 개섭과 맞붙기는커녕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나가 버렸어. 같이 있던 사람들이 형가를 다시 부르려고 했어. 그러자 개섭이 말했지. 

“그 사람 이미 떠나고 없을 거요.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요.” 

겁이 나서 내뺐을 거라고 무시하는 거였지. 실제로 사람들이 형가가 묵는 곳에 가보니 형가가 수레를 몰아 유차를 떠난 뒤였어. 그가 겁쟁이라는 게 밝혀진 꼴이었지.

또 형가가 한단에서 돌아다닐 때였어. 노구천이라는 유협하고 장기를 두었는데, 장기 수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졌어. 노구천이 노해 꾸짖자 이번에도 형가는 말없이 달아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이게 무슨 꼴인가? 정말 형가는 겁쟁이에 불과한 걸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은 뒤 형가는 다시 연나라로 돌아왔어. 돌아와서도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살아갔지. 그곳의 개백정과 축(筑, 중국 고대의 현악기로 우리나라 거문고와 비슷하게 생겼고 대나무로 현을 타는 악기야)을 잘 연주하는 고점리와 어울려 날마다 시장바닥에서 술을 마셨어. 백정이나 악사나 먼 옛날에는 비천한 사람들이었으니 그들과 어울렸다는 건 그만큼 형가의 삶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는 걸 말해주지. 술에 취하면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는 그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더불어 즐겼는데, 그러다 서로 울기도 하면서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했다고 해. 여기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말이 나왔지. 시장 바닥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울고 웃으면서 형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 사람들아,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 큰 뜻을 당신들이 알 턱이 있겠는가, 이렇게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실제로 형가는 그렇게 겁쟁이 행보를 보이고 저자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술 취한 행동을 보이곤 했지만, 돌아서서는 늘 신중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항상 책을 가까이했어. 떠돌아다닐 때도 늘 그곳의 현인, 호걸, 덕을 갖춘 어른들을 사귀길 잊지 않았지.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건 자기를 키우고 당당하게 실력을 키우는데 애썼다는 말이야. 그러니 방약무인이란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내 길을 걸어간다는 말이었지. 


마침내 좌절 속에서도 자신을 키우던 형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어. 연나라의 처사(處士, 권력이나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실력을 갖추며 살아가던 선비를 일컫는 말) 전광 선생이 그를 잘 대접했어. 전광은 형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 형가를 알아본 전광. 이제 형가의 삶에 변화가 생길까? 

이후 형가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연나라 태자 단의 삶으로 잠깐 돌아갈 필요가 있어. 태자 단은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어. 그때 진나라의 태자 정도 조나라에서 태어나 단과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 사이였어. 그러던 정은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었지. 그 진나라 태자 정이 바로 후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이야. 정은 진나라 왕이 되자, 연나라 단을 자기 나라 볼모로 데려가. 그런데 자기가 왕이 되어 진나라가 부강해지자 친구로 지내던 연나라 태자 단을 하찮게 보게 되었지. 그래서 단을 전혀 옛 친구로 대접하지 않고 제대로 예우하지도 않았어. 단은 그것이 원망스러워 진에서 도망쳐 고향 연나라로 돌아왔지. 그 홀대를 잊지 못해 단은 진나라 왕에게 원수를 갚고 싶었으나, 이미 진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나라가 되어 버렸지. 오히려 진나라는 다른 제후국들의 땅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어. 

그러던 때 태자 단은 진나라 왕에게 반란을 꾀하다 달아난 번오기라는 진나라 장수의 망명을 허락하게 돼. 연나라의 대신들은 불안해졌지. 가뜩이나 태자가 도망쳐서 진나라의 미움을 샀는데, 진나라 왕의 원수를 받아주겠다고 하니 말이야. 특히 태부 벼슬을 하고 있던 국무는 번오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격렬히 반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이야. 

진나라 왕 정은 번오기의 반란을 진압하자, 번오기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그 친족들을 노예로 삼아버려. 아주 잔인한 복수였지. 


“안 됩니다. 저 포악한 진나라 왕이 연나라에 원한을 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두려운데, 하물며 번 장군이 연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는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 놓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속히 번 장군을 흉노(중국의 서북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목민족) 땅으로 보내어 진나라가 트집 잡을 일을 없애십시오. 그리고 진나라 외 다른 나라와 손을 잡고 대처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나 태자는 국무의 말을 거부했어. 몸 둘 곳 없어 찾아온 번오기를 흉노에게 넘길 수는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지. 아마 이러든 저러든 진나라의 침공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라리 명분을 움켜쥐는 것이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아. 

태부 국무는 거듭된 읍소에도 태자가 자신의 계획을 들어주지 않자,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어. 전광 선생을 만나 지혜를 구해보라는 것이었지. 태자는 그 말은 얼른 들었어. 국무에게 전광을 연결시켜 달라고 부탁했지. 형가를 알아봤던 전광 기억하지? 그가 연나라 태자와 연결되는 순간이야. 

국무에게 말을 들은 전광이 마침내 태자를 만나러 갔지. 태자는 문 앞에서 전광을 맞이해서 뒤로 물러나면서 길을 안내했어. 앉을자리쯤 가서는 태자가 직접 무릎 꿇고 앉아 자리의 먼지를 털었어. 그건 왕족이 시골에 숨어 사는 선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반대로 촌부가 왕족을 맞이하는 태도였지. 태자 단의 절실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야. 

주변을 다 물리친 후 태자는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 전광에게 의견을 물었어. 

“연나라와 진나라가 함께 있을 수 없으니 선생께서 그 대책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광이 대답했지. 

“신이 듣건대 준마(駿馬)는 기운이 왕성할 때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늙고 쇠약해지면 노둔한 말도 앞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태자께서는 신이 젊고 왕성할 때의 일을 들으시고 신이 노쇠한 줄을 모르십니다. 비록 그렇지만 감히 나랏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신과 절친한 형가라는 사람을 추천할 만합니다.”

당연히 태자는 형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지. 

볼일이 끝난 전광은 바로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나갔어. 그때 태자가 문까지 배웅하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 

“우리가 나눈 얘기는 나라의 큰일입니다. 선생께서는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전광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대답했지. 

“알겠습니다.” 

그 길로 전광은 형가를 찾아가 태자를 만나주기를 청했지. 형가는 자기를 알아주는 전광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 

형가의 허락을 받은 후 전광이 말했어. 

“내가 듣건대 나이 들고 덕 있는 사람은 행동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자께서 내게 ‘우리가 나눈 얘기는 나라의 큰일입니다. 선생께서는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는 태자가 나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할 때 남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부디 속히 태자를 찾아가 전광은 이미 죽었으니 일이 새나갈 염려가 없음을 분명히 전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전광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어. 

앞에서 전광이 태자의 당부를 듣고 왜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대답했는지 이제야 알겠지? 전광에게는 태자에게 비밀을 누설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이었던 거지.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은 그 정도로 허약하고 의리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거야. 정말 무서운 의협심이 아닐 수 없어. 

형가는 곧바로 태자를 찾아가 전광이 죽었음을 알리고 그의 말을 전했어. 태자 단은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지. 자신의 불신의 말 한마디가 훌륭한 선비를 죽인 꼴이 되었으니 말이야. 태자가 마음이 급해선지, 본디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해선지 큰 실수를 한 것이었어. 잠시 뒤에 마음을 가다듬은 태자가 말을 이었어. 

“내가 전광 선생께 조심하라고 부탁드린 것은 나라의 큰일을 성공시키고 싶어서였고, 지금 전광 선생께서 죽음으로 이 일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으셨으니,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전광 선생이 그대를 만날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는 하늘이 연나라를 가엾게 여기고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천하의 땅을 다 빼앗고 천하의 왕을 모두 신하로 삼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온 나라의 힘을 모아도 진나라를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 제후들이 다 진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에 우리와 손잡으려는 나라도 없습니다. 용감한 사람이 있어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큰 이익을 미끼로 진나라 왕이 공격을 멈출 수 있다면 좋겠지요. 혹은 왕을 위협하여 제후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모두 되돌려주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진나라 왕을 찔러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나라 왕이 쓰러지면 반드시 내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틈을 타서 나머지 나라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형가께서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한참을 고민하던 형가가 대답했어. 

“이렇게 큰 나라의 일을 해낼 재능도 지혜도 없습니다. 제게 과분한 일입니다.”

형가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뭘까? 진짜 자신이 없어서일까? 예전에 다른 의협들을 피해 달아날 때처럼? 그건 아닐 거야. 태자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였을 거야. 진심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일을 맡길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었겠지. 과연 태자는 그의 거절에 깜짝 놀라 형가 앞으로 가 머리를 조아리며 일을 맡아달라고 강하게 부탁했어. 형가는 그제야 태자의 진심을 보고 마침내 허락했지. 


번오기의 결단


태자는 형가에게 상경의 벼슬을 주고 최고급 관사에 머무르게 했어. 그리곤 날마다 최고급 음식과 진기한 물건들을 주고, 수레와 말과 미녀들을 보내 형가에게 최상의 대접을 했어. 

그런데 형가는 그런 호대접을 받으면서 진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 사이 진나라는 연나라 바로 근처인 조나라를 깨뜨리고 조나라 왕을 사로잡았어. 진의 군대는 점차 북상해 거의 연나라 국경 근처까지 이르렀지. 그러자 태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형가를 불렀어. 

“진나라 군대가 머지않아 역수(易水, 조나라와 연나라 국경에 있는 강)를 건너오면 선생을 더 오래 모시려도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형가가 대답했어. 

“태자께서 부르지 않으셨어도 신이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제가 진나라로 지금 가더라도 뭔가 믿음을 줄만한 것이 없으면 진나라 왕 근처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진나라 왕은 지금 여기 망명 와있는 번 장군의 목에 황금 천 근과 일만 호의 식읍을 걸었습니다. 만약 번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의 노른자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가 진나라 왕에게 바친다면 진나라 왕이 기뻐하며 신을 만나줄 것입니다. 그때 신이 태자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는 곤란했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인 번 장군을 배신하라는 이야기였으니까. 

“번 장군은 곤궁을 피해 내게 와서 몸을 맡겼습니다. 나를 믿고 온 사람을 내 욕심 때문에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가는 태자가 번오기의 목을 베지 못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물러나와 몰래 번장군을 만났어. 

“진나라는 장군을 참혹하게 대했습니다. 장군의 부모와 종족을 모두 죽이거나 노비로 만들었고, 이제 장군의 목에 황금 천 근과 일만 호의 식읍을 내걸었습니다. 앞으로 어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에 번오기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어.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골수가 빠지듯 괴롭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 도망 온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가가 말했어. 

“지금 단 한 가지 연나라의 걱정을 없애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번오기에게 이보다 희소식이 있을 수 있을까? 형가에게 다가가 물었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형가가 답했어. 

“장군의 목을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진나라 왕은 필시 기뻐하며 저를 가까이 맞아 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왼손으로는 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왕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도 갚아줄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 그리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잔인한 질문이었지. 당신 원수를 갚아 줄 테니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번오기는 그 끔찍한 제안을 반가워하며 답했어.

“이것이야말로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살면서 기다리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어. 아마 형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그를 신뢰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을 보면. 

전광의 죽음도 그렇고 번오기의 죽음도 그렇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끔찍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야.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시대가 고대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고대인들의 삶은 지금 우리의 삶보다는 단순했어. 우리처럼 생각이 많고 이리저리 논리를 따지는 정도가 약했다는 말이야. 감정도 더 격했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 망설임이 덜했지. 그러니까 전광과 번오기의 죽음 이야기를 오늘의 관점에서만 판단하면 안 돼. 큰 뜻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을 새겨들으면 되겠어.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는 태자


이제 진나라 왕에게 바칠 번오기의 목이 준비되었어. 연나라 독우의 지도야 연나라의 것이니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다음으로 제일 필요한 것이 한 번에 진왕을 암살할 수 있는 비수(匕首)였어. 이것은 태자 단이 조나라 귀족의 것을 황금 백 근이나 주고 사서 준비했어. 그 칼은 독을 묻힌 후 조금만 스치게 해도 즉사하게 되는 예리한 칼이었지.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어. 형가가 진나라로 떠나기만 하면 되었지. 

그런데 태자 단은 거사(巨事)를 앞두고 예의 의심증이 도졌던 모양이야. 형가 혼자 보내기가 미덥지 않았던지 진무양이라는 연나라 사람을 형가의 조수로 붙였어. 그것은 형가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어. 형가는 자신의 벗과 함께 가길 희망했지. 그런데 그 벗이 멀리 살아 형가가 있는 곳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 자연히 출발이 지연되었지. 이번에는 태자의 조급증이 도졌어. 형가가 시간을 끌자 혹 마음이 바뀌어 자객으로 가는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지. 그래서 거듭 떠나기를 요청했어.

“떠날 날짜가 벌써 지났습니다. 경께서는 무슨 다른 뜻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무양을 먼저 보냈으면 합니다.” 

여기서 태자가 형가를 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 상경의 벼슬을 주었기 때문이지. 


당신이 안 가면 내 부하를 보내겠다는 말이었지. 이 말에 형가가 화를 내며 태자를 꾸짖었어. 

“태자께서는 어찌 진무양을 보내려 하십니까?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입니다. 비수 한 자루를 가지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진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머무른 것은 제 벗을 기다려 함께 가려던 것인데, 이렇게 보채시니 그만 하직하고 떠나겠습니다.”

진나라 왕을 암살하는 엄청난 일을 진무양 같은 애송이에게 맡길 수 있느냐는 질책, 큰 도움을 줄 벗을 기다리는데 그걸 참지 못하냐는 질책이었지. 하도 보채니 바로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고. 태자의 의심증과 조급증은 후에 큰 장애물로 등장할 거야. 형가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태자가 보채는 바람에 형가는 자기의 흐름을 찾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어. 태자와 이 일을 알고 있는 빈객들이 모두 흰색 옷과 모자를 쓰고 형가를 배웅했어.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고대의 방식이었지. 국경에 있는 역수 가에 이르러 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떠날 때, 둘도 없는 친구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노래를 불렀어. 이 노래가 그 유명한 역수가(易水歌)야.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사람들은 이 노래를 비분강개하며 들었지. 지금도 이 노래는 비장하게 임무를 향해 떠나는 사람의 심정을 담은 대표적인 노래로 꼽혀. 노래를 마친 형가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떠났는데 끝내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 결심한 것을 묵묵히 앞뒤 재지 않고 실천하는 형가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형가는 진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천금이나 되는 예물을 진왕이 심복 부하인 중서자(왕을 보좌하는 비서 같은 벼슬) 몽가에게 바치고 진나라 왕에게 접근하려고 했어. 뇌물을 받은 몽가는 형가를 연나라 왕이 항복을 하러 보낸 사신으로 진왕에게 소개했지. 형가가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 독항의 지도를 들고 왔다는 사실도 상세하게 전하고 말이야. 이에 진나라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증정의식을 베풀도록 허락했어. 

증정식에 진나라 왕은 예복을 갖추고 높은 사신을 맞이하는 예를 베풀어 연나라 사자를 수도 함양에 있는 함양궁으로 불러들였지. 일촉즉발의 시간이 온 거야. 진왕이 앉아있는 궁궐에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가 든 상자를 들고 들어갔고,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가 든 상자를 들고 차례로 나아갔어. 그런데 왕의 제단 앞에 이르자 진무양이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벌벌 떨었어. 태자 단이 먼저 보내겠다고 한 진무양의 배짱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야. 진무양이 이상하니 신하들이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어. 그때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가 사과했어. 

“북방 오랑캐 땅의 천한 사람인지라 천자를 뵌 적이 없어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부디 왕께서는 이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사신의 임무를 마치도록 해주십시오.” 

대단한 담력이었어. 진무양이 만든 위기를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말로 넘길 수 있었지. 진왕은 의심을 거두고 형가에게 말했어. 

“진무양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가져오시오.” 

형가는 떨고 있는 진무양에게 지도상자를 받아 진나라 왕에게 바쳤어. 


진왕을 치는 형가


형가가 진왕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는 것이지. 진나라 왕이 상자를 받은 후 지도를 펼쳤는데, 지도가 다 펼쳐지자 비수가 드러났어. 비수를 안에 넣고 지도를 둘둘 말았던 것이지. 그 순간, 형가가 달려들어 왼손으로는 진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쥐고 진나라 왕을 찌르려고 했어. 그러나 하늘의 뜻이 진왕에게 있어서일까? 비수가 닿기 전에 진왕이 놀라 몸을 물리며 일어서자 그만 소매가 뜯어졌고 비수는 허공을 찔렀어. 왕의 옷이 이리 쉽게 찢어지다니. 진왕은 물러서며 주변에 놔두었던 칼을 집었어. 그런데 칼이 너무 꽉 꽂혀 있어서 빠지지 않았어. 형가가 곧장 달려들자 진나라 왕은 칼을 들고 기둥을 돌며 달아났어. 진왕 주변의 신하들은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어. 게다가 진나라 법에는 왕의 전(殿) 위에는 신하들이 무기를 가지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비수를 들고 있는 형가를 막을 방법이 없었어. 호위무사들은 전 바깥뜰아래 늘어서 있었으나 왕이 부르기 전에는 전 위로 올라갈 수 없었고. 진나라 왕은 너무 다급해서 병사들을 부를 겨를도 없었어. 그새 형가는 계속 진왕을 쫓아 비수를 휘두르고 있었지. 진왕 주변 신하들은 맨몸으로 형가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때 왕의 의사 하무저가 가지고 있던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는데 그것이 형가에게 맞아 시간을 벌 수 있었지. 의사가 무술을 연마한 장수도 아니고 그가 던진 약주머니가 어떻게 정확히 형가를 맞힌 것일까. 그 순간 신하들이 외쳤어. 

“전하, 칼을 등에 지십시오!”

진왕은 기둥과 자기 사이에 칼을 등지고서야 칼을 뽑을 수 있었고 쫓아오던 형가를 내리쳐 그의 왼쪽 다리를 벨 수 있었어. 형가는 쓰러지면서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지만 살짝 빗나가면서 왕의 뒤 구리 기둥에 꽂히고 말았어. 형가의 비수는 두 번이나 진왕을 벗어났어. 진왕은 무기를 잃은 형가를 여덟 번이나 찔러 상처를 입혔어. 형가는 더 이상 일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기둥에 두 다리를 벌리고 간신히 기대어 앉아 웃으며 죽음을 맞았어. 눈앞에서 성공을 놓쳐버린 안타까운 죽음이었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지. 진왕의 소매가 너무 쉽게 찢어졌고, 하무저가 던진 단 한 개의 약주머니는 정확히 형가를 맞추었으니 말이야.  



진왕 영정은 진시황으로


전국 시대 제후국들의 명암은 여기서 갈리게 되었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진왕은 다시 군사를 다그쳐 다른 제후국을 향한 정복 전쟁에 매진했고, 차례로 다른 나라들을 무너뜨려갔지. 연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니 암살 시도로 더욱 화가 난 진왕의 노여움 덕에 더 빨리 패망하게 되었지. 그 과정에서 연나라 왕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도망하여 숨어 살던 태자 단을 찾아내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쳤어.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지. 진왕은 다른 나라를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전국칠웅 중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제나라마저 멸망하고 나자 중국 천하는 진나라로 통일되었어. 진왕 정은 스스로 황제라는 지위를 만들어 자기를 진시황으로 칭하고 그 자리에 올랐지. 춘추전국시대의 왕으로 만족할 수 없어 더 높은 이름을 만들었던 거야. 형가가 암살에 성공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를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이 이렇게 탄생했어.


고점리의 복수 시도 


친구를 잃은 고점리는 어찌 되었을까. 통일제국 진에서는 형가, 태자 단과 관련된 사람들을 수배했어. 그러니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지. 고점리도 이름을 바꾸고 남의 머슴으로 살아갔어. 그러다 숨어 사는 삶에 지친 고점리는 다시 예인(藝人)으로 돌아와 축을 켜기 시작했지.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의 연주 솜씨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진시황에게까지 전해졌어. 진시황은 궁전으로 고점리를 불러들여 연주를 들었어. 황제의 신하들은 고점리가 자객 형가의 친구임을 금방 알아챘지. 진시황은 그걸 알고도 고점리의 축 솜씨가 아까워 그를 죽이지는 않고 눈을 멀게 하는 벌로 대신했어. 그리고는 점점 더 자주 고점리의 연주를 즐겼지. 그러던 어느 날 고점리는 축에다 무거운 납덩어리를 감추어 넣었다가 진시황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자리를 향해 축을 내던졌어. 친구가 하지 못한 암살을 다시 시도한 것이야. 하지만 역시 진시황의 운명은 거기서 끝날 것이 아니었나 봐. 진시황은 고점리의 살수(殺手)를 피했고 고점리는 죽임을 당하지. 그렇게 형가와 사귀던 벗도 함께 비극을 당했어. 

훗날 형가를 겁쟁이로 봤던 노구천은 형가가 진나라 왕을 찌르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쳤어. ‘나는 왜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전에 내가 그를 얕잡아보고 화를 냈을 때 그는 아마 나를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겠구나.’ 

노구천의 말이 맞는다고 봐. 형가는 누가 뭐라 하든,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자기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지. 노구천 등이 겁쟁이로 평가해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 자신이 해야 할 더 큰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의협들과 기싸움을 하느라 인생을 날리는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지. 제후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력을 쌓는 것을 잊지 않았고, 신분 사회의 한계를 벗어 위로도 아래로도 사귐의 제한을 두지 않았어. 방약무인(傍若無人).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제 할 일을 했던 사람이지. 그래서 결국 태자 단의 절실한 부탁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당시 어떤 제후도, 어떤 장수도, 어떤 나라의 군대도 하지 못했던 일,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물리칠 수도 있었던 단 한 명의 사람이 될 수 있었어. 비록 실패는 했지만 천하를 한 번 크게 흔들어 놓는 사람으로 역사가 기억하게 되었지. 


형가의 삶이 우리에게 웅변하는 것은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야. 한 사람의 성취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준비하여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낼 때 가능하다는 것을 형가를 통해 배울 수 있어. 우리 동희, 지애도 자기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이길 바라. 그리고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여겨지면 주위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되길 바라. 그래서 한 번쯤 천하를 뒤흔드는 큰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형가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멋진 중국 영화가 있어 소개한다.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영웅]이라는 영화야. 

사기열전 속 형가의 모습이 영화에서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영화에서는 전란을 멈추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

무명이라는 자객이 진왕 영정을 죽이지 않는 선택을 하지. 

장이머우 감독이 왜 그렇게 내용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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