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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Jul 18. 2024

옛 것이 가장 앞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문장

너희들에게 아홉 번째로 들려주고 싶은 고사성어는 온고지신이라는 말이야. 익힐 온(溫), 옛 고(故), 알 지(知), 새로울 신(新)으로 이루어진 말이지. 옛 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는 뜻인데, 공자가 한 말로 [논어] 원문에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되어 있어.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본이 되려면 옛 것을 기반으로 새것까지 모두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온고’가 먼저 나옴으로 해서 옛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강조하고 있지. 오늘날 옛 것은 낡은 것, 청산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뭐든지 새것이 좋고 어떻게든 새것으로 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야. 미래로의 발전을 얘기하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나간 것들은 다 의미 없는 것일까? 공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오히려 사람들의 삶이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옛 가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어. 공자는 누구나 아는 동방의 성인(聖人)이지. 그가 주장한 여러 가지 교훈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 이번 온고지신 편에서는 공자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옛 것을 지키려고 애썼던 점에 주목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흙수저 공자


지금 대단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실제 공자의 삶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어. 오히려 아주 비참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지금 표현으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지. [사기(史記)]에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숙량흘이라는 사람이 안씨와 야합(野合)하여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야합이라는 것은 정식 혼인을 거치지 않고 남녀가 결합하는 것을 말해. 지금 식으로 말하면 공자는 사생아인 셈이야. 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무관(武官)이었고, 어머니는 노나라에서 상례(喪禮, 죽은 이를 위한 의례)를 담당하는 무속 집안의 셋째 딸로 아주 젊었다고 전해져. 지금도 그렇지만 무속 집안은 결코 지위가 높지 않았지. 그러니 나이 많은 무관이 젊은 무속 집안의 딸과 눈이 맞아 낳은 아이가 공자였던 거야. 공자의 이름은 구(丘)야. 언덕이라는 뜻인데 머리 정수리가 낮고 그 둘레가 높은 짱구여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러니 공자의 이름을 우리식으로 부르면 ‘공짱구’인 거지. 이름을 지은 폼을 보아도 훌륭한 집안의 귀한 자식이라고 보긴 어려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도 알지 못했고,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와 함께 묻어드리려 했으나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고 기록된 걸로 봐서는, 숙량흘의 집안에서도 공자를 챙기지 않았던 것 같아. 공자는 그렇게 변방의, 별 볼일 없는 무당 집 아들로 자라났어.


부모의 자산


출신이 한미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산(資産)이 있었고 그것은 평생 그를 지탱하는 힘이 돼. 공자는 우선 아버지의 체구와 체력을 물려받았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거구에 괴력을 가진 장군이었다고 해. <춘추좌전>에, 노나라 군대가 성에 유인되어 갇힐 위기에 빠졌을 때, 닫히는 성문을 혼자서 받쳐 노나라 군인들이 빠져나가게 했을 정도로 힘이 셌다고 기록되어 있어. 거의 삼손 수준이었지. 아버지를 닮아 공자도 거구에 체력이 대단했어. 사람들이 모두 공자를 키 큰 사람으로 기억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의 체력은 그가 칠십 넘게 장수하면서 끝까지 지속했던 공부의 바탕이었고 각 나라 제후를 설득하러 먼 길을 유세(遊說)하며 공들여 제자를 키울 수 있었던 바탕이었어.

그 당시 평균 수명이 40살도 안 되었다고 하니, 공자는 매우 장수한 사람이야.

어머니 안씨로부터는 예술적 소양과 능력을 물려받을 수 있었어. 무속(巫俗)은 원래 음악의 기원이거든. 그래서 무가 집안 사람들은 모두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음악에 조예가 깊게 마련이지. 우리나라도 전통음악이라고 하는 판소리나 산조 등이 모두 무속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야. 상례(喪禮) 등 의례(儀禮)를 치르려고 하면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니 그걸 집행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음악에 능력이 있어야 했겠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가에서 자란 공자는 이런 음악적 능력을 물려받게 되었어. 이는 후에 공자가 사회를 음악적인 조화(造化)의 질서로 바라보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지.

이런 영향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부모의 영향은 그들의 출신 지역이었어. <사기>에는 숙량흘의 조상이 송(宋)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했어. 송나라는 상나라가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상나라 유민(流民)들이 모여 산 나라야. 그러니 송나라에는 상나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지. 상나라의 특징은 신에 대한 제례(祭禮)가 발전했다는 거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점복(占卜)을 통해 결정했고, 각종 의례를 발전시켰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갑골문(甲骨文)이라는 것도 상나라에서 점을 칠 때 거북의 등껍질[甲骨]에 글씨[文]를 새겨 불에 구운 후 갈라진 모양을 보곤 했는데, 그 등껍질에 새겨진 글씨를 말하는 것이지.

공자는 이런 상나라의 전통에 매우 관심이 많았어. 어린아이 때부터 공자는 제사 그릇을 늘어놓고 예의와 자태를 갖추는 놀이, 즉 의례 놀이를 소꿉놀이처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의례의 전통에 밝았기 때문에 후에 이 전통을 예를 숭상하는 유가의 질서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거지.

아버지의 집안은 송나라였지만, 숙량흘은 노나라의 장수였고, 어머니도 노나라 사람이었지. 노나라도 여러 제후국 중 특별한 나라였어. 바로 주공(主公) 단(旦)의 나라였기 때문이지. 주공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야. 무왕이 일찍 세상을 뜨자 그의 어린 아들인 성왕이 등극했고, 주공은 삼촌으로서 섭정(攝政)을 하게 되지. 그는 매우 뛰어난 능력의 사람이었어. 이제 막 태동한 주나라의 모든 행정적, 정치적 기반을 다져 제국으로서의 기틀을 완성하지. 주나라의 모든 법률과 의례가 망라된 책 <주례(周禮)>를 주공이 정리했다고 전해지지. 왕인 조카는 어리고 자기는 능력이 있으니 아마도 자기가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우리 조선 역사에서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주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조카가 왕위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보필한 후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어린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 천하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 후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거지. 그 주공이 분봉받은 땅으로서 노나라는 높은 치국(治國)의 경지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라로 인정받았던 거야.

노나라를 주공이 직접 다스린 적은 없어. 섭정을 하느라고 말이야. 대신 아들이 바로 다스렸고 대대로 주공의 자손이 다스렸지.

공자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 바로 주공이야. 나이 들어 꿈에 주공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할 정도로 흠모했지. 단지 주공이라는 사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주공이 정립한 주나라의 제도, 체계와 정신을 흠모한 것이지. 온 나라가 가족적 질서 속에서 우아한 조화를 이루던 주나라의 제도야말로 완벽한 나라의 제도라고 생각했어. 그 주나라의 전통이 공자의 유가 사상의 커다란 한 축을 이루는 것이지.


선비의 길


이처럼 상나라와 주나라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것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고쳐서 유가 사상을 만들어낸 사람이 공자야. 그러니 부모의 유산을 철저히 계승한 사람이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기가 가진 것을 극대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훗날 공자는 이렇게 고백해.

“나는 태어나면서 지식이 있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논어], 술이편)

공자는 열다섯에 뜻을 공부에 두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어. 평민에서 출발하여 제환공에게 신임을 얻어 제나라를 패자로 만든 재상 관중처럼 되고 싶었겠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 아직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있을 때, 노나라를 지배하던 대부 계씨가 선비들에게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어. 그러나 계씨의 부하인 양호가 공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말했지.

“대부께서는 선비[士]들에게 연회를 베푼 것이지 당신 따위에게 연회를 베푼 것이 아니요.”

공자 자신은 선비로 대접받을 만큼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선비로 알아주지 않은 것이지.

그래서 공자는 낮은 지위에서 벼슬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 고작 계씨 집안의 재물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지. 공자는 묵묵히 정직하게 일했어. 그가 저울질하는 것은 공정했어. 그래서 조금 뒤에는 직리(職吏)라고 대부 집안의 가축을 관리하는 관리를 맡게 되었지. 그가 일을 맡게 되자 집안의 가축들이 살찌고 새끼를 많이 낳게 되었어. 공자가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지. 그래서 그는 곧 공사와 땅 관리를 도맡아 하는 사공(司空)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어. 대부의 밑에서 신뢰가 점점 쌓여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러면서 동시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밑으로 제자들도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어.


첫 유세


점점 자신감이 생긴 공자는 그즈음 처음 유세를 떠나지. 자신의 공부와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공자를 받아주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었어. 제일 가까운 제나라부터 송나라, 위나라로 해서 더 먼 진(陳)나라, 채(蔡)나라까지 찾아갔지만 천대받고 고통만 받다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와야 했지. 그나마 한직(閒職)이라도 주는 곳이 노나라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결국 공자는 젊은 시절을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어.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치는 일이었지.

공자는 사십 대 중반이 되도록 이렇다 할 활약을 해보지 못해. 중간에 이웃 제나라 경공의 맘에 들어 봉읍을 받을 기회가 있긴 했지. 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父父子子).”

너무 뻔한 말 같지? 하지만 이 짧은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어. 춘추전국 시대 혼란상은 주나라 시절의 질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공자 시대에는 이미 군주인 제후의 자리를 대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어. 공자가 나고 자란 노나라의 경우도 계씨 등 세 집안의 대부가 군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셌으니까. 그런 무질서를 바로 잡아서 서로 공경하며 조화를 이루는 집안처럼 나라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지. 이 말에 경공은 매우 기뻐했어. 나라의 질서를 잡아야 하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공자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좋았을 테니까. 그래서 경공은 공자에게 작은 봉읍을 하사하려고 하지.

하지만 제나라 재상이었던 안영이 이를 가로막고 나서. 안영은 관중의 명성을 잇는 명재상으로 후대에 기록되는 사람이야. 관중이 지녔던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지. 그가 보기에 주나라의 전통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자의 모습이 너무 안이하게 보였던가 봐. 주나라는 이미 쇠했고 주나라가 세운 예악(禮樂)은 이미 무너졌는데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옛 대안을 추구하는 그를 등용해서는 무한경쟁에 들어간 시대를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거야. 안영을 비롯해서 다른 대부들조차 반대하자 경공은 공자에게 봉읍을 주려던 것을 철회하지. 이것이 공자가 중년에 이르도록 잡아본 유일한 기회였어.


노나라 개혁


이후 노나라는 대부들이 제후를 우습게 보고, 대부 밑의 선비들은 대부를 우습게 보는 하극상(下剋上)이 연출되고 있었지. 대부가 제후보다 더 화려한 집을 짓고 더 화려한 연회를 베풀고 정치를 농단하며 올바른 예의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나라가 되었어. 앞서 공자를 문전박대했던 양호 같은 사람은 제 상관인 대부 계씨를 가두고 핍박하기까지 했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자, 공자는 작은 벼슬살이에서도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 등 옛 문헌들을 편집하며 지냈어. 그런 인문적 능력을 높이 산 사람들이 제자로 찾아들면서 일군의 공자 학단을 형성하게 되지. 공자 또한 찾아오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집안을 보지 않고 오로지 제자들의 능력만 보고 가르치는 모범을 보여서 후대 모든 스승의 사표(師表)가 되지.

[이런 그의 태도는 공자 스스로 “有敎無類” 즉, 가르치는 데 있어 사람의 류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어.

공자의 나이 쉰에 다다르자 다시 한번 인(仁)의 정치를 펼쳐 볼 기회가 열렸어. 당시 대부들의 간섭에 시달리던 노나라 정공(定公)은 대부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공자에게 제후가 직접 다스리던 중도(中都)라는 작은 읍을 맡겼어. 공자는 마치 준비된 선수처럼 자신의 이론을 실천해 나갔고 곧 중도를 노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어. 1년 만에 사방의 제후들이 공자가 다스리는 방법을 따라 했다고 전해질 정도였지. 지방 정치에서 모범을 보이자 곧 중앙관료인 사공(司空)으로 진급하고 곧 대사구(大司寇,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장관) 자리에 오르게 되었어. 그는 노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외교 문제에까지 자문을 하면서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지. 특히 제나라와 회맹(會盟)할 때에 예(禮)의 전문가로서 강대국인 제나라를 예의 문제로 제압하면서 외교의 자문역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전해져.

그가 대사구로서 한 일 중 가장 큰 것은 노나라에서 전횡을 일삼던 세 대부 집안(계손, 맹손, 숙손)을 견제하는 일이었어. 그들은 노나라 임금이 세운 성벽보다 더 높은 성벽을 자신들의 봉읍에 세워놓고 완전히 독립된 나라처럼 자기 봉읍 사람들을 다스렸어. 이에 공자는 그들의 성벽을 허무는 것으로 그 권력을 무너뜨리려고 했지. 이런 정치적 결단은 모두 예전 주나라가 세운 가족적 봉건제도를 이상향으로 두는 태도를 정치에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어. 처음 이 조처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 계씨의 경우, 자기 부하인 공산불뉴가 집안 땅을 차지하고 저항을 하는 형국이었으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왔고 숙손씨도 스스로 성벽을 허물었지.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어. 공산불뉴는 병력을 이용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맹손씨는 제나라와 가까운 자기 땅의 성을 허물면 나라가 위태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끝내 성벽을 허물지 않았고 버텼지. 이로 인해 대부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나라 정공의 힘을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어서 공자는 대사구를 넘어 상국(相國, 즉 재상)의 일까지 대리하게 되었어. 그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자 노나라는 금세 변화하게 되었어. 석 달이 지나자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함부로 집어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관리들이 자기 일을 충실하게 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섰다는 이야기이지. 공자가 공부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정치에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지.

공자가 계속 상국 노릇을 했다면 노나라가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공자는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어. 먼저 이웃의 강대국 제나라에서 공자로 인해 노나라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어. 제나라에서는 여서라는 사람이 꾀를 내어 여든 명의 미인들을 노나라 군주에게 보냈어. 미녀들은 노나라 도성 남쪽에서 날마다 연회를 벌였지. 그 모습을 보느라 노나라 군주와 대부들은 정무를 게을리 하게 되었어. 공자 혼자 개혁을 위해 노력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나라의 정치가 무너지기 시작했지. 게다가 노나라의 대부들이 자기 집안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공자를 다시 견제하고 나섰어. 그들은 노나라 군주에게 압력을 넣어서 공자에게서 멀어지게 했지. 정공은 어쩔 수 없이 공자에게 예를 다하지 않게 되었어. 공자는 이에 자신이 떠날 때라는 것을 직감하고 뒤 돌아보지 않고 노나라를 떠나 주변 나라들로 유세(遊說)를 떠나지.


두번 째 유세


그로부터 14년 간, 공자의 유세 활동은 별다른 소득 없는 떠돌이 생활이었어. 처음 위나라에 갔을 때는 노나라에서 받던 녹봉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으나 곧 공자를 시샘하는 위나라 신하들의 참소로 열 달 만에 위나라를 떠났지. 그 이후로 진(陣)나라, 조(曹)나라, 채(蔡)나라, 정(鄭)나라, 송(宋)나라 등을 다니며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자를 받아주는 군주는 아무도 없었어. 송나라는 아버지의 고향이라서 나름 기대를 했지만 집 한 채 얻을 길이 없어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했고, 그나마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일 듯이 위협하며 그 나무를 뽑아버리는 행패를 해서 쫓겨나고 말았지. 나라 사이의 경쟁과 쟁투가 심해지는 가운데, 인과 예를 말하는, 옛날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자는 공자의 논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동안 적으로 오인 받아 공격당하기도 하고, 포위당하여 몇날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가장 듬직한 제자였던 자로마저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할 정도였어. 공자 스스로도 “나의 도(道)에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 공자가 정나라에 갔을 때였어. 제자들과 만나기로 했으나 길이 어긋난 공자 홀로 성곽의 동쪽 문에 서 있었어. 제자들이 급하게 스승을 찾고 있었겠지? 정나라 사람 중에 하나가 제자 자공(子貢)에게 말했어.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생김새는 독특한데, 풀이 죽은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어요.”

늙고 지친 공자의 모습이 상갓집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음식 찌꺼기라도 얻어먹으려고 문 밖에 서 있는 상갓집 개 모양이었다는 이야기야. 나중에 스승을 찾게 된 자공은 공자에게 숨기지 않고 그 사람이 한 이야기를 했어. 그러자 공자가 웃으며 대답했어.

“그래, 상갓집 개와 비슷하다는 건 맞는 말이야!”

공자 스스로도 비참한 자신의 처지가 씁쓸해서 웃었을 거야. 이런 공자의 모습은 유교를 창시하고 모든 유학자들이 우러러보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 아마 오늘날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자의 모습도 이렇게 초라하지는 않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도 공자는 좌절하지 않았어. 그가 남긴 어록인 [논어(論語)]의 첫 편에 이런 말이 있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의 일생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 말은 참으로 크게 울림을 주고 있어.


교육의 길


공자는 십사 년의 고생을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어. 노나라 계씨 집안에서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가 대부 자리를 물려받자, 공자를 다시 노나라로 초청해주어서야. 하지만 여전히 공자에게 등용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어. 공자도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 다만 제자를 가르치는 지원만을 요구했지. 그래서 노나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곡부(曲阜, 취푸)에 교육 시설을 차려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일과 저술 활동에만 몰두했지. 결국 이런 말년의 노력이 [논어]라는 위대한 책으로 남게 된 셈이지.

지금도 곡부에 가면 공자와 그 집안의의 묘인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 집안이 황제들을 접대하며 공무를 보던 관청인 공부(孔府) 등 삼공(三孔)이라고 불리는 유적지를 볼 수 있어.


우리 딸들도 공자처럼 오래된 것이 간직하고 있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고 갈고 닦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자꾸만 정이 메말라가고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커져만 가는 세상, 전통은 사라지고 온갖 외래의 것으로 뒤덮인 정체불명의 문화를 살아가야 하는 세상, 인간이나 나라나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감정과 정신을 되살리는 일은 공자만이 추구해야 할 일은 아닐 거야. 우리 모두 온고지신의 정신을 살려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게 한 뒤에 비전을 모색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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