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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Aug 02. 2024

정정당당한 사람의 힘, 호연지기(浩然之氣)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편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고사성어는 호연지기라는 말이야. 클 호(浩), 자연스러울 연(然), 어조사 지(之), 기운 기(氣)로 이루어진 말이지. 크고 자연스러운 기운이라는 뜻으로, 맹자가 자신이 지닌 장점으로 바로 호연지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 유명해진 말이지. 


어느 날 공손추라는 제자가 맹자에게 물었어.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것을 잘하십니까?” 

맹자가 대답했어. 

“내 장기는 지언(知言)에 있고, 또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를 줄 아는 데 있다.” 

맹자 스스로 자신의 장기 두 가지를 꼽았는데 하나가 지언이고 하나가 호연지기였어. 지언이라고 하면 말을 안다는 것인데, 단순히 말을 안다기보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잘 분석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거야. 그래서 맹자는 유가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제자백가의 사상들을 잘 분석하여 자기만의 논리를 갖출 수 있었지. 

또 한 가지 장점은 호연지기였는데 이것은 정의로운 기운으로 자신을 채워서 사악함에 방해를 받지 않아 천지간(天地間)을 가득 채울 정도의 힘찬 의지와 자신감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것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이것을 잘 기르는 것이 맹자의 장기였다는 거야. 맹자는 이 두 능력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고, 후대에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 즉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하늘 아래 가장 당당한 사람이었던 맹자의 이야기야. 


맹자의 성장과 공부


맹자가 성장할 때의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 다만 한나라 때 학자인 유향(劉向)이라는 사람이 쓴 [열녀전(列女傳)]에 맹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에 맹모(孟母)를 통해 맹자의 어린 시절을 살펴볼 수는 있어. 맹자 어머니 이야기는 전해지는데 아버지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아. [궐리지(闕里志)] 등의 책에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적혀 있어. 어머니 이야기만 남아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거야. 

[열녀전]이라고 하니 아마 수절한 열녀(烈女)를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고 나열할 열(列)자를 쓰는 열녀전이야. 「사기열전」처럼 역사가 기억할만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열한 전(傳)이라는 이야기이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힘을 다룬 흔치 않은 저서이지. 

바로 [열녀전]에 그 유명한 맹모삼천(孟母三遷, 맹모가 세 번 집을 옮기다)의 고사(古事)가 나오지. 맹자가 어릴 때, 처음 맹자의 집은 묘지 근처에 있었다고 해. 그러자 맹자가 늘 묘지 의식을 흉내 내며 놀았다고 하지. 우는 시늉도 하고, 매장하는 시늉도 하고. 맹자를 장례 치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바에야 우려스러운 일이었겠지. 그래서 맹모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갔어. 이번에는 맹자가 물건 파는 상인들 흉내를 내면서 놀았겠지. 맹모는 맹자를 상인으로 키울 생각도 없었어. 다시 한번 이사를 해서 학교 근처에 집을 마련했어. 이번에는 맹자가 의식(儀式)을 치르는 법, 예(禮)를 갖추어 행동하는 것을 흉내 내며 놀았어. 맹모는 그제야 아들을 키울 만한 곳에 자리 잡았다고 안심을 하고 눌러살았다고 해. 의식을 치르고 예를 갖추어 행동하는 것은 물론 유가의 중요한 덕목이니 맹자가 훗날 최고의 유가 사상가가 되는 것은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겠지. 이 이야기는 사실 유무를 떠나서 맹자가 어릴 때부터 바른 어머니 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어. 

맹모의 바른 교육은 맹자가 성장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고 해. [열녀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흔히 ‘맹모단기(孟母斷機)’라는 사자성어로 전해지고 있지. 맹자는 자사(子思, 공자의 제자)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전해져. 자세한 공부 과정은 알려진 바 없으나 어린 시절부터 집을 떠나 공부를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맹자가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 아마 타향살이가 매우 힘들어서였겠지. 그때 마침 맹모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어.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마 당황했을 거야. 

어머니가 맹자에게 물었어. 

“배움이 어디까지 이르렀느냐?” 

맹자가 답했어. 

“큰 변화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맹자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사를 세 번이나 가면서 뜻을 세워준 아들이니 말이야.

맹자의 어머니는 갑자기 칼을 들어 짜고 있는 베를 끊어 버렸어. 맹자가 깜짝 놀라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지.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어. 

“아들아, 네가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무릇 군자라면 공부를 해서 이름을 세워야 하고, 학문을 통해 지식을 넓혀야 하고 이를 통해 거할 때 평안하고 활동할 때 걸림이 없어야 한다. 지금 공부를 그만 두면 낮은 지위를 면할 수 없고, 우환을 멀리할 도리가 없게 된다. 베 짜는 일을 그만 두면 어떻게 지아비와 자식을 입히고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여자가 밥벌이를 포기하고 남자가 덕 기르기를 게을리한다면 도둑이 되거나 남의 밥을 빌어먹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맹자는 밤낮으로 공부하며 쉬지 않았다고 해. 맹자 어머니의 일화가 모두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 하지만 이런 일화가 전해오는 것은 맹모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매우 노력했다는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고 맹자가 목표가 분명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는 점을 증명하는 셈이지. 이런 공부의 과정을 통해 맹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과 지혜, 경륜을 지닌 선비로 성장하게 되지. 


맹자가 살아간 시대


맹자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던 때는 중국의 역사가 춘추 시대를 지나 전국 시대로 깊숙이 진행되었을 때야. 앞서 들려주었던 굴원의 이야기 기억나니? 맹자는 굴원보다 조금 앞선 시대, 그러나 상황이 매우 비슷했던 시기를 살았어. 중국이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서쪽의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강력해지던 때였지. 진나라는 법치(法治)를 앞세워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일으켰어. 흔히 전국시대의 법치를 이야기하면 인정머리 없이 법대로 몰아붙이는 몰인정을 먼저 떠올리곤 하는데, 그런 단점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야. 단점만 있었다면 진나라가 그 정책으로 성공할 수가 없었겠지. 법치의 장점은 정치를 집행하는 데 있어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야. 귀족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책무를 지는데 모두 동참하게 만들었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법치가 큰 장점을 발휘했어. 진나라는 상앙이라는 재상을 중심으로 법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국시대 최강국으로 발돋움했던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했지? 이렇게 법치를 통해 부국강병을 일으키는 것을 변법(變法)이라고 해. 진나라가 강력한 나라로 발전하자 주변 나라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변법을 시행하기 시작했지. 맹자가 활약할 때는 바로 이런 흐름이 강력하게 중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야. 


맹자의 유세


맹자는 세상이 모두들 강력한 법치를 이야기할 때 홀로 공자의 정신에 입각한 인치(仁治)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유세를 하고 다녔지. 대략 15년 동안 양(梁)나라 혜왕, 제(齊)나라 선왕, 추(鄒)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노나라 평공 등에게 차례로 유가의 정신과 치세의 방법을 알리고 다녔어. 

양나라의 원래 이름은 위(魏)라고 해. 혜왕이 즉위하고 나서 다른 나라의 서슬에 밀려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겼기 때문에 양혜왕으로 불리게 되었어. 

맹자가 유세를 할 때는 반드시 왕의 초청을 받을 때에만 응했어. 공자처럼 뜻을 펼치기 위해 먼저 움직이는 법이 없었지. 게다가 한 번 움직일 때는 매우 화려한 사절단을 이끌고 움직였다고 해. 왕이 그만한 대접을 하면서 초청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야.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상갓집 개’처럼 외로워야 했던, 앞서 보았던 공자의 사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야. 맹자가 유세를 나선 나이는 50대 추반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공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어. 앞에서 맹모의 이야기를 통해 본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제외하곤 말이야. 다만 왕들이 거액을 들여 화려한 시종을 붙여서 초청할 정도라면 유가(儒家)의 통치이념에 대해 들을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으로 인정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어. 이런 화려한 유세를 두고 맹자의 제자조차 과한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는데, 맹자는 전혀 괘념치 않았어. 왕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정도의 대접이 뭐가 대단하냐고 말할 정도였지. 공자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아주 당당한 사람이었어. 그렇다고 맹자가 명예에 급급했던 사람도 아니야. 맹자가 기대한 것은 왕의 스승으로 서는 것이었어. 제환공이 관중을 끝까지 믿고 지지하며 제나라를 키웠듯이, 왕이 자신의 경륜과 전략을 믿고 따르기를 원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조언을 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어. 왕들이 태도가 달라졌을 때 그 모든 대가를 거부하고 맹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키우는데 남은 생을 투자했지. 맹자가 보여준 이런 당당한 태도는 정말 너희들이 배웠으면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어. 

맹자가 유세에 나서 처음 만난 양혜왕은 맹자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어. 

“맹선생, 천리 먼 길 노고를 사양치 않고 와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이익이 생기겠지요?” 

전쟁을 불사하며 싸우던 전국시대에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 많은 선비들이 그 이익을 얻게 해주는 방법을 가지고 유세를 다니기도 했고. 하지만 맹자의 대답은 달랐어.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찌해야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말씀하시면 밑에 있는 대부도 ‘어찌해야 나의 봉읍에 이익이 있을까?’라고 말할 것이고, 그리되면 그 밑의 선비도 따라 이익을 말하고, 그 밑의 백성도 모두 이익을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전차 만 대를 가진 나라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자는 필히 전차 천 대를 가진 대부일 것입니다. 만약 의를 경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한 나라의 대부는 왕의 소유를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의를 말씀하셔야지 이익을 말씀하여선 안 됩니다.” 

인이란 사랑이고 의란 정의이지.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는 나라는 안정적이지만 이익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본질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 참으로 한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돌아가는 것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지. 실제로 당시 법치로 인해 고달픈 백성들은 인의로 다스려지는 사회를 그리워하고 있었어. 그때는 지금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이란 것이 분명치 않고 느슨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좋은 나라로 옮겨 다니곤 했지. 맹자의 말대로 한 나라가 인과 의로 다스려진다면 많은 백성이 그 나라로 모여들었을 거야. 사람의 숫자가 곧 농사 인력이요, 전쟁의 힘이었던 시기이니,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명분만 세우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어. 맹자는 양혜왕에게 섣부르게 이익을 논할 것이 아니라 정치의 본질인 인의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었지. 맹자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증명되기도 해. 진나라가 법가(法家)의 정신을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시키긴 했지만, 2대를 넘지 못하고 망하고 말잖아. 그것은 통일 후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법치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인치(仁治)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지. 

그 인치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민락(與民樂)’이야. 맹자는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백성들이 왕을 지지하고 진심으로 왕을 따르며 나라를 근본적으로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마음속 깊이 따르는 것을 맹자는 심복(心腹)이라고 했어. 만약 전쟁이 났다고 해 보자. 한 나라의 백성은 왕을 심복하고 있고,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치면, 두 나라가 싸울 때 어느 나라가 이길까? 마음 깊이 왕을 따르는 백성이 있는 나라가 이길 수 있겠지. 그래서 맹자는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는 왕이 있는 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어. 그래서 이렇게 양혜왕에게 또 말했지. 

“만약 왕께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신다면 천하의 왕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는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왕에서 선비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들은 모두 인의를 잘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어.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인은 사람이 사는 가장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이 가야 할 가장 바른 길이다. 지금 사람들은 가장 편안한 집을 비워놓고 머물지 않으며, 가장 바른 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니,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맹자는 특히 지도자들이 그런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어. 그리고 왕 앞에서도 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잘못을 비판하는데 추호의 두려움을 보인 적이 없어. 제나라로 유세 가서 선왕과 이야기할 때였지. 맹자가 제선왕에게 물었어. 

“왕의 신하 중에 자기 처자(妻子)를 친구에게 잘 보살펴 달라 부탁하고 초나라로 여행 간 사람이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오히려 친구가 자기 처자를 추위에 떨게 하고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왕께서는 이런 친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선왕이 말했어. 

“절교하겠습니다.”

맹자가 이어 말했지. 

“만약 고위직에 있는 신하가 자기의 하급 관리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면직시키겠습니다.” 

맹자가 곧바로 물었어.  

“만약 한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엉뚱한 말을 해댔어. 

당시 정치체제로 보면 한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왕이 능력이 부족해서란 말이지. 제대로 일 못하는 친구와는 절교하고 신하는 잘라버리는데, 제대로 일 못하는 왕은 어찌해야 하냐, 왕이야말로 똑바로 일 잘하라는 비판의 말이었던 것이지. 왕이 신하의 생사를 마음대로 하던 시대인데, 그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다른 사례를 들어 비유적으로 끌고 가면서 이야기해서 꼼짝 못 하게 하는 수사법(修辭法)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거야. 아무튼 무척 대담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이것이 그가 말한 호연지기의 한 모습이겠지. 

나아가 맹자는 왕이 인의를 갖추지 못한 패악한 자라면 죽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 어느 날 제선왕이 물었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추방하고,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정벌하였다 하는데, 정말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제선왕은 임금이 바뀐 역사적 사실에 대해 물어보고 있는 거야. 중국 역사는 하나라에서 상나라(은나라),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바뀌었고, 이 말을 할 때는 주나라가 무너져 전국시대가 되었을 때라는 것을 기억하자. 

맹자가 답했어. 

“역사책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뭘 아는 것을 물어보느냐는 투로 말했던 것 같아. 그러자 제선왕이 다시 물었어.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왕과 신하의 구분이 명확한데 왕이 좀 잘못했다고 혁명을 통해 왕을 죽이고 왕좌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지. 이에 맹자가 말했어.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 도둑)’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 잔인한 자)’라 하며, 이러한 잔적한 사람은 그저 필부(匹夫)에 불과합니다. 저는 주나라 무왕이 필부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왕조 시대에는 들을 수 없는 굉장한 발언이지? 인과 의를 해치는 왕은 왕이라고 할 수 없고 무지렁이 촌부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그러니 그런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 이 구절이 바로 맹자가 ‘역성(易姓)혁명’을 주장했다는 근거가 되는 부분이야. 맹자는 생각의 중심을 인치에 두었기 때문에 백성을 배반하는 지도자, 특히 그 우두머리인 왕의 부도덕, 패악을 인정할 수 없었어. 왕이 잘하면 나라가 달라질 수 있었던 왕조의 체제에서 더욱 왕의 바른 역할이 중요했고, 그래서 맹자는 더욱 왕의 인의를 강조했던 거야. 이런 맹자의 정신은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서 정도전(鄭道傳) 같은 사대부 혁명가가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역성혁명을 일으키는데 바탕이 되기도 했지. 

역성(易姓)이란 말 그대로 성을 바꾼다는 것이니 세습하는 왕을 갈아치워 새로운 성의 왕을 들이는 혁명을 한다는 말이지. 우리나라가 고려의 왕씨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이씨가 왕이 되었지. 

이렇게 옳은 일을 위해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맹자는 ‘대장부(大丈夫)’라고 불렀어. 우리가 흔히 쓰는 대장부라는 말이 맹자에게서 비롯한 거야. 맹자는 대장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고 말했어. 

“마땅히 세상에서 가장 넓은 저택인 인(仁)에 살고,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위치인 예(禮)에 서며,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인 의(義)로 가서, 뜻을 얻었을 때는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큰 길을 따라 나아가고, 뜻을 얻지 못했을 때는 홀로 자신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부귀(富貴)도 나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고, 빈천(貧賤)도 나의 의지를 바꿀 수 없으며, 권위와 무력도 나의 절개를 굽힐 수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이 말대로라면 맹자야 말로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지. 

맹자는 여러 나라로 유세를 다니면서 인의를 통한 천하통일에 힘썼어. 위(양)나라나 제나라에 유세할 때는 그들 나라가 아직 힘이 강했으므로 그들을 통해 중국의 변화를 꿈꾸었고, 추나라나 등, 노나라를 유세할 때는 그들 나라가 천하통일의 그릇은 아니었지만, 한 나라의 모범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 왕을 설득했지. 하지만 왕들은 그의 말을 실천하지 않았어. 진나라를 무서워하며 진나라의 변법(變法)을 따라 하려고만 했지. 또 왕 밑의 신하들도 인과 의를 강조하는 맹자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여서 그를 왕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만 했지. 그렇게 자꾸 외면당하는 가운데 맹자는 시대의 흐름에 따를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가지 않았어.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지.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구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죽기를 마다하지 않겠고,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고 실제로 맹자는 그렇게 행동했어. 왕들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않을 때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대접을 해주어도 뒤도 안 돌아보고 물러나곤 했지. 

맹자가 거의 말년에 노나라 평공을 만나려고 할 때야. 평공은 적극적으로 맹자를 만나려고 했는데, 평공이 총애하는 신하인 장창이라는 사람이 막고 나서. 맹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아버지보다 성대히 치른 것을 문제 삼으면서 말이야. 맹자가 자기보다 높은 자리로 나아갈까 봐 걱정이 되어서 한 일이지. 사실 그것은 비판받을 일은 아니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맹자가 평범한 선비에 불과했으니 장례가 소박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대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장례의 격이 자연스럽게 화려해진 것이었지. 노나라에서 이미 지위를 얻고 있던 맹자의 제자 악정자가 평공에게 이것을 정확히 논박하곤, 맹자에게 와서 평공이 스승을 만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지. 이런저런 사정을 듣고 난 맹자는 이렇게 말했어. 

“일이 되는 것도 하늘이 그를 도와주기 때문이고, 일이 되지 않는 것도 하늘이 그것을 막기 때문이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그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 제후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어찌 장씨 따위가 내 길을 가로막는 것이겠느냐?”

맹자의 말에서 다시 한번 그의 기상을 느낄 수 있지. 내 뜻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는 하늘에 달렸지, 그깟 제 잇속만 챙기는 필부의 농간 때문이겠냐는 이야기야. 이제 더 이상 공직(公職)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맹자는 당당했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나 하늘이 더 이상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겼지. 그리곤 후학(後學)을 기르는데 힘을 모아 아성(亞聖)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야. 


우리 딸들도 맹자의 그 당당함, 호연지기를 배웠으면 좋겠어. 항상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행동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아빠가 마지막으로 호연지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야. 너희들이 늘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희들이 아빠보다 더 오래 살아갈 세상인데, 대장부가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과 함께 호연지기를 기르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대장부로서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분명히 너희들이 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 되리라고 확신한단다. 이제 앞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고사성어로 호연지기를 고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겠지? 


자. 고사를 통한 인생이야기, 아빠의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마치려고 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직도 모자란 느낌이야. 언젠가 더 좋은 이야기, 더 재밌는 이야기, 더 훌륭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때까지 멋지게 자라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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