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세기 1:27)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 종교와 예술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이어졌고, 그중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연출도 분명 있었지만, 어느 한 장면 앞에서는 마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멍해졌습니다. 바로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벌거벗다시피 한 DJ가 앉아 있었고, 제자들의 자리는 여장을 한 남성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프랑스 특유의 해학이라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을 가진 저로서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힌 분들조차 “이건 아름답지 않다”, “의미가 없다”, “불쾌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교를 떠나서라도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선한지 본능적으로 아는 마음의 기준이 있구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인간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신이라는 존재 없이도 지켜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없이 선과 악의 기준을 세우려 한다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선하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악이라 말한다면, 세상은 금세 혼란으로 가득할 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어떤 공통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창세기의 한 구절이 오래전 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에덴동산을 흐르던 네 강 중 하나인 ‘비손강’ 이야기였습니다. 그 강은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물줄기를 찾아볼 수 없지만, 성경은 그 강이 흐르던 땅에 금과 보석이 가득했다고 기록합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 2:10-12)
그 말씀을 묵상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원래는 이렇게 보석이 가득한 아름다운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겠구나.’
그때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전공을 살리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습니다. 몇 년 동안 애써 쌓아 온 경험들이 한순간에 무너진 듯 느껴졌고, “나는 누구일까?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비손강을 묵상하며 이런 기도가 제 마음에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막연한 기도였지만, 이후의 삶에서 점점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마케터, 콘텐츠 기획자로 일했던 시간들, 사역자의 아내로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들, 그리고 지금 '문사모'로 살아가는 제 사역의 중심에는 여전히 이 기도가 살아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단지 존귀하다는 뜻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 창조성과 사랑이 우리 안에 새겨졌다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상하고, 공감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정의를 갈망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저는 제 자신을 자주 비하하곤 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조건이 안 좋으면 ‘실력’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 없다고 느껴질 땐 제 존재 자체가 너무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제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야.”
그 말은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내 모습’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내 안에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은 회복될 수 있다는 진리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희망으로 피어났습니다.
환경도, 나 자신도 도무지 희망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내 삶의 ‘희망 자체’가 되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제 안엔 변명할 이유도, 절망할 명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어진 존재로서 빛과 생명을 전하는 삶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