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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Nov 24. 2022

외로움과 회식의 상관관계

사실 우리는 모두 채워지기를 원하는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다. 오후 여섯시가 다가오면 슬그머니 주변 직원의 눈빛을 살피는 사람. 헛기침과 "오늘 약속 있나"를 기어이 꺼내는 그들의 이름은 중년 남성이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으면서도, 아니 그 반대로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기 때문에 집에 가기가 싫다. 내 말 잘 들어주는 부하 직원들이랑 소주 한잔 하면서 업무 이야기나 더 하고 싶을 뿐이다.


젊은 직원들은 회식을 싫어한다. 중간 관리자들도 다 안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랑 먹는건 즐겁지 않을까"와 같은 자의식 과잉과 "그래도 부하 직원인데 상사 말을 들어야지" 따위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애써 그 마음을 무시해 본다. 대신 그들은 최선을 다해 부하 직원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 자신이 어떻게 이 업무를 잘하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자신이 얼마나 치열했고, 얼마나 젊은 나이에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했는지. 부하 직원들의 동공이 풀리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입은 쉬지 않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오늘도 기다렸던 팡파레가 울린다.


회식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 작가는 회식을 "남자들에 의한 고기의 독점" 이라 칭했다. 문유석 판사는 2017년 새해의 첫 칼럼을 "저녁 회식 하지 마라"라는 명문장으로 시작하였다. 개인적으로 회식의 핵심은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를  맞이하고 있거나 혹은 맞을 예정인 사람들이다. 나이 드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이제껏 생존을 위해 해온 노력들.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자존심을 눌러가며 지새웠던 밤을 위로받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의 많은 중년 남성이 알코올 의존증과 약간의 불안장애를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우리는 회식을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권력이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인사 불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회식이었다. 여기에는 한가지 빈틈이 있다. 그렇다면 그 권력자는 왜 부하직원에게 그런 가학성을 보이는 것일까? 경제 성장의 주역이자 집안의 가장인 그들은 자신의 불행을 왜 그렇게 아랫사람에게 푸는 것일까. 아무도 행복하지 않으며 모두가 정신과 건강을 잃기만 하는 회식 자리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도대체 왜,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왜 아무에게도 득될 일 없는 일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조선 반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은 1910년대 이후 53년 6.25 전쟁이 마무리되기까지 어느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는 땅이었다. 최빈국에서 10대 경제 대국이 되기까지 불과 100년도 걸리지 않은 이곳은 가히 기적의 땅이다. 청년과 중년 남성은 그 기적의 주역이었다. 특히 60년대를 지나며 70, 8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이끈 이들은 제조업의 샐러리맨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칼라든, 생산직에 종사하는 산업역군이든, 그들은 성장을 위해 하루 온종일 노동해야했다. 가정에서의 생활과 개인으로서의 만족은 성장에 비하면 더없이 하찮았다.


과도한 노동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실제로 과로는 음주와 흡연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괴로운 심신을 뇌가 가만 놔두지 못해 일시적인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실제 80년대에 일한 회사 선배들은 그때 그 시절 퇴근이 12시가 기본이었다고 회상한다. 12시에 퇴근을 하고도 술을 새벽 2시까지 마셨다며 아련한 회상에 빠지던 그들 눈에 그리움이 보였다면 너무 간 것일까. 죽을 듯이 일하고 먹고 마시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브로맨스로 세상을 견뎌왔던 사람들. 그 안에 멀쩡한 정신과 온전한 가정이 들어설 자리가 있었을까 싶다. 이 나라는 결국 청년의 마음을 갈아넣어 경제를 성장시킨 셈이다. 성장과 경쟁, 조직과 상명하복. 가정을 등한시해도 어떻게든 살아가지는 삶. 경제 성장의 뒤에 우리에게 남은건 지독한 비인간성일지 모른다.


회식을 원하는 중년 남성도, 회식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 직원도, 집에서 술 취한 남편을 보살펴야 하는 중년 여성도, 아무도 그 비인간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중년 남성이 지독히 외롭고 불행하여 밑의 사람에게 가학적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것이 사회생활이고 조직의 생리라며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회식이 디폴트가 아닌 나라나 조직이 주변에 뻔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개인이 풀기에 대단히 복잡하지만, 회식이라는 사회 현상은 예외적으로 풀어내기 그리 어렵지 않다. 단지 한사람 한사람이 인간성을 회복 하기만 해도 우리가 업무 후에 아랫사람의 위에 알코올을 들이부을 일은 줄어들 것이다. 자기가 행복하고 사랑받으며 이 사회에서 온전하다고 느낀다면 굳이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의 영혼 없는 리액션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본인을 인정한다면 부하 직원의 최고에요 부장님을 듣자고 법인 카드를 장착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향정신성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무언가를 헌신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을 향한 가학성을 거두고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타인 혹은 사물에 대한 사랑은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솔직함과 용기, 겸손과 배려, 너그러움과 인정. 사랑하는 마음. 나는 진심으로 중년 남성에게 덕질을 권한다. 자신의 역할에 따른 책임을 이행하려고만 하지 말고 한번 무언가를 사랑해보시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는 모두 채워지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나에게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나 정도면 훌륭하다고, 잘 살아왔다고 나의 노고를 인정해주기를. 그러나 참으로 잔인하게도 세상은 대통령이나 유명 스포츠 선수가 아닌 사람을 채워주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해답은 하나뿐, 세상을 알아주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 남성에게 외치고 싶다. 외로워 말라, 사랑한다면, 온 세상이 당신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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