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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울음의 증발과정

by Sylvan whisper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오직 간접적인 방식만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 그 본질에 직접 손을 뻗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린 필연적으로 더 많은 시도, 더 다양한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일수록, 그 절대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의 가장 비정한 속성은 여기서 옵니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 한스러운 일들을 많이 겪어야 합니다.

많이 겪을수록 고통은 배로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 비정한 속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이 겪어서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그렇다면 좋은 일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이른 나이에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고 듣고 겪어야 했던 순간들 앞에서

저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왜 나는 어린 20대 시절에 친구와 동기의 허망한 죽음을 보아야 했을까요?

크나큰 사고들을 마주해야 했던 것은 단지 직업적 특성 때문이었을까요?

그 속에서 나는 왜 수많은 고통과, 혼란을 견뎌야 했을까요?


하나의 죽음 앞에서는, 배회하는 애통함과 혼란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끝도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노래하는 사람을 보며 두려웠고,

어떤 죽음 앞에서는 역할을 감당하느라 강인한 척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감정의 진공상태에 이르러 조용히 주변과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걸로 저는 '성장'한 걸까요?

죽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한 걸까요?

한때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통찰에 한걸음 가까워졌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들을 다시 되돌아보면,

이해나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제가 느낀 것들은 너무나 왜소합니다.


저는 아직도 죽음을 접하면 아프고 혼란스럽습니다.

따라서 여태까지 겪었던 모든 죽음들이 제겐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없고

현명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제 감정의 결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아주 조금 더 담담하게,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눈물에 젖지 않은 얼굴로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책에 담기지 못한 다른 죽음들을 포함하여,


제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불러봅니다.


아직은 씁쓸한 마음과 입술 한쪽 끝이 떨리는 표정을 짓게 되지만,

조금 더 겪고, 조금 더 아프게 되면

훗날엔 담담한 미소로 그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주신 고마운 분들에게도

그들의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은 사람들들의 기억을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덜 혼란스럽게 만드는 데

아주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조용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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