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가는 기차를 예매하였다. 갈 때는 기차를 타고 가고 탐워스로 돌아오는 1/1일에는 카셰어 하는 형들의 차를 타고 돌아오기로 약속하였다. 달링하버에 가서 맥주를 먹으면서 불꽃축제를 보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게 계획이었다. 불꽃이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맥주를 먹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서로서로 해피 뉴 이어를 외쳐댔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시드니의 가장 큰 조지 스트릿은 차량통제가 되어있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해피 뉴 이어라고 외쳐대며 아주 신나는 축제를 즐겼다. UK형이 친구랑 나의 사진을 찍어준다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이 그 모습을 보고 다 같이 찍어주겠다며 친절하게 다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였다. 하루를 마감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시티에 있는 피시방 야간 정액을 끊고 피시방 의자에서 잠들었다.
2012년 1월 1일, 스카이다이빙과 함께 한 해를 시작했다. 스카이다이빙은 미리 예약을 해놨기에 샵에 도착하자 버스를 타고 시드니 외곽으로 이동했다. 레저를 좋아하는 우리가 기다렸던 레저 끝판왕 스카이다이빙 너무나 기다려졌다.
“와 개 쫄 리는데?”
“뭘쫄리냐, 쫄보새키냐”
설렘반 두려움 반으로 기다리다 보니 간단히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다이빙복으로 옷을 환복 했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경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강사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카메라로 인터뷰를 시도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이윽고 뛰어내릴 상공까지 다도착했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미끄러지듯이 강사는 뛰어내렸다. 자유낙하 동안 아찔한 중력을 느꼈다. 아무에게도 의지 할 수 없지만 공중에 떠있는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사의 신호와 함께 낙하산이 펼쳐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 행복했다. 이렇게 난 가장 행복한 기분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드니에 돌아와서 카셰어를 하는 옆집 주인형한테 연락을 했으나 다른 팀을 태워간다고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급히 기차를 예매하러 갔으나 기차 또한 매진이었다. 장기 포지션에서 성실성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던 찰나에 결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피시방에서 급히 중고차 매물을 찾아봤다. 그러다 병구가 중고차 매물을 하나 발견했다. 시드니 시티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이 판매하는 차량이었다. 친구랑 돈을 모았지만 돈이 부족해서 엄마랑 누나한테 돈을 조금씩 빌렸다. 그렇게 겨우 차를 구입하고 탐워스로 향했다. 호주에서는 둘 다 운전해본 적이 없었다. 병구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기로 하였다. 시드니를 빠져나오는 도로에서 병구가 갑자기 차를 꺾더니 보도블록이 있는 작은 화단을 날아 넘었다.
“야이 새키야 운전 똑바로 안 하냐?”
“아 표지판 잘못 봤다.”
“차 안 그래도 오래됐는데 다 부서져서 타워스 못 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와 진짜 죽을뻔했다. 방금”
다행히 우리는 멀쩡했다. 그리고 자동차도 멀쩡했다. 우리는 무사히 탐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장기 포지션에서 꿋꿋이 일을 했고 마침내 친구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체격 좋은 사람 3명이 보였다. 슬라우터로 새로 온 한국인인 것 같았다. 보통 체격이 좋은 사람들은 펀치 (양털을 벗기는 작업)라는 공정에 많이 배정을 받는데 펀치에 2명 그리고 내가 있는 장기 파트에도 한 명이 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동민이라고 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동민이 형은 양 장기 파트에 있으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형들은 한국에서 보디빌더를 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돈을 벌러 호주에 왔다고 했다.
“형님 돈 벌려면 여기 만한 공정이 없습니다. 처음엔 힘들지만 그것만 버텨내고 요령이 생기면 꽤 할만할 거예요.”
동민이 형은 분위기 메이커였다. 영어는 못하지만 아주 밝고 자신감이 있었기에 바디랭귀지로 외국인들과 얘기하거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나한테 부탁하고는 하였다. 그런 형을 보면서 중요한 건 언어 실력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열정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집에 가면 라면 봉지를 혼자서 뜯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아팠다. 손은 퉁퉁 부었고 매일같이 얼음찜질을 해주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아파 일이 가기 싫었다. 그래도 친구와 함께라 출근을 하였다. 출근을 하면 손톱이 고통스러워 밴드로 손톱을 감는 것부터 시작했다. 밴드를 혹여나 감지 못하는 날이면 하루가 다 꼬이고는 했다. 그래도 친구와 동민이 형이 같이 일을 했기에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넷북이 고장 나서 모니터가 꺼지지 않고는 했었는데 그걸 보고 오해한 집주인형이 전기를 아끼지 않는다며 그럴 거면 집을 나가라고 하였다. 그전부터 몇 번 경고가 있었고 주인형이 화가 많이 나있는 상태였다. 어린 나 또한 모니터가 고장 나서 그런 거다 등 이것저것 변명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얘기하는 게 싫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 친구는 원래 살던 집에 계속 머물고 나는 짐을 싸서 나와 동민이 형 집 거실에서 임시로 생활하였다. 시간이 있을 때에는 시내 부동산 가게에 찾아가서 집을 찾아보러 발품을 팔았다. 결국 동민이 형 집 뒤에 있는 집을 렌트했다.
처음 집을 쫓겨났을 때만 해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걸까 생각을 하고 화도 나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더 좋은 일이었다. 렌트를 해서 방 셰어를 내어주고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처럼 집주인 형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형들과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형들과 이웃사촌이 되면서 형들하고는 더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퇴근을 하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손가락은 아파도 운동을 하기에는 문제가 없을 듯 보였다. 형들 중 가장 큰형인 철희 형하고 같이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철희 형은 내가 모르는 운동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쉬는 날에는 형들과 여행도 같이 갔다. 밥도 같이 먹고 하며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6개월이 지나 한국에 돌아갈 날이 되었다. 처음 목표했던 30000불은 못 벌었지만 지금까지 벌었던 돈을 보니 26000불가량 되었다. 환율로 계산해보니 한국돈으로 3000만 원이었다. 내 나이 23살. 6개월 만에 3000만 원을 모으다니 나 자신이 정말 기특했다. 친구는 세컨드 비자를 신청해서 1년간 호주에 더 머물기로 하였다. 나도 많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고민이 참 많았다. ‘세컨드 비자를 받아 1년을 더 있을까’ 생각을 하기도 하고 호주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는 생각, 부모님 말씀대로 고졸로 회사에 취업하는 코스 등 다양하게 생각했지만 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호주에서 지내야 했기에 집과 차는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둔 채 시드니로 떠났다.
“형님들 고마워요. 시드니까지 배웅 와주시고”
“아이다 우리 다 뭐 볼일 있어 온 건데”
“니도 햄들하고 잘 지내고 워킹 잘 마치고 돌아 오너라”
“그래 알다. 조심히 가라”
“응 간디.”
“가보겠습니다. 형님들 그동안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