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2년 전 즈음에 그리스에 있는 히드라(Hydra) 섬에 머문 적이 있었다. 사실 그리스에 그런 이름을 가진 섬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친구의 남편이 그곳에 노후에 살 집을 사놨다고 하면서 사전에 이야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해서 마침 그리스 여행을 가게 됨 김에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게 되었다.
히드라 섬은 배를 타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높은 날에는 배편이 끊긴다. 그리고 섬 안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다. 차가 다니지 않는 관계로 무거운 짐은 노새(donkey)를 이용해서 나른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치는 장면이 노새를 끌고 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배에서 내려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가격을 흥정하면 짐을 노새에 싣고 숙소까지 옮겨다 준다(히드라 섬은 가운데에 산이 있는 지형이어서 계단이 무척 많은데 노새가 계단을 그렇게 잘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히드라 섬에는 선착장이 있는 바닷가 쪽에 음식점과 카페들이 몰려 있는데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있으면 그곳을 이용하는 섬주민들이 서로 모두 아는 사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 카페에 가보면 마치 사랑방처럼 섬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비가 오는 날에는 배가 섬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하역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없게 되어 주로 그곳에서 시간을 때운다).
그곳에서의 하루 일과라고는 식사를 하고 커피를 한 잔 하고 섬을 둘러보다가 쉬는 일이 전부다. 그곳에서는 딱히 서두를 일도 없다. 심지어 길 고양이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와 무릎에 앉거나 다리에 털을 비빈다. 그곳은 몇백 년 전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았을 것이다(유럽의 소도시들 역시 예전 중세의 모습 그대로 살고 있는 곳들이 많다).
분명히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 서울에서의 삶과 그곳에서의 삶은 도저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약 우주인이 있어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서울을 탐사하고 온 우주인과 히드라 섬을 탐사하고 온 우주인이 본 지구인의 삶의 모습이 과연 같은 시대의 지구를 보고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 같은 세계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예전에 세계적인 EDM 음악축제인 UMF(Ultra Music Festival)에 가본 적이 있다. 거래처 아는 분이 티켓을 줘서 가본 것이 었는데, 사실 난 그때까지 클럽이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UMF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그곳에 도착한 순간 문화충격에 빠졌다. 전 세계에서 온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온갖 요란하고 개성 있는 복장을 하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순간 이런 곳에 오기에는 너무 단정하게 옷을 입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창피했다.
페스티벌의 운영 방식은 잠실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곳곳에 디제잉을 하는 부스들이 만들어져 있고 시간대 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DJ가 와서 디제잉을 한다. 참석한 사람들은 원하는 곳에 가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면서 놀면 되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서 마실 수 있다. 그냥 거대한 야외 클럽이다. 해가 떨어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는 술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날뛰는 사람들 속에서 자칫하다가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구나라는 생각에 무척 놀라웠다(무엇보다 놀랐던 건 이런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규모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아마 그곳에 가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였다. 아마 그중에는 일상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게 사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제한적인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산다. 그러고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여행이라곤 가본 적이 없이 자기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살다가 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곳이 세상의 전부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 죽을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삶인지 여부를 떠나서 딱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가 한 제일 나쁜 짓은 안 그래도 짧은 인생에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을 할 시간을 1년 넘게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에는 보다 많은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