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이직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여행을 하고 싶어서 퇴사를 한다고요?”
“네. 여행이 너무 하고 싶습니다”
“아니 이 책임이 지금 20대라면 뭐 이해하겠는데요. 마흔이에요. 마흔! 2세 낳고 일하고
돈 벌 나이라는 거죠. 그것도 열심히! 오케이! 알았어요. 갔다 와서는 뭘 할 건데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지금 여행을 못하면 나중에 정말 후회할 것 같습니다”
“중남미를 2년 정도 여행하고 오려고...”
“네에? 중남미요? 거기 위험하지 않나요? 갱단에 마약에 전염병도 있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는 하던데 나와 아내는 이상하게 중남미가 끌리더라고... 경비는 일단 퇴직금으로 충당하고 그 돈 다 쓰면 상가에서 나오는 월세로 버터 보려고!”
“나도 진심 남미 가고 싶다. 처자식만 없으면! 브라질에 가서 설운도처럼 삼바~ 삼바~ 하면서 삼바 축제 보고 싶고 미인들이 많다는 베네수엘라도 가보고 싶고... 아무튼 진심으로 축하해!”
“부러우면 너도 여행 가면 되잖아!”
“난 이번 생애엔 틀렸어. 애들이 벌써 초등학생들이야. 다음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때는 꼭 갈 거야!”
연애할 때부터 세계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침 튀겨가며 이야기를 하곤 했기에 여행을 떠나면 복권 당첨된 사람처럼 꽥꽥 소리 지르며 자기계발 서적에서 나올 법한 멋있는 문장들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행복에 겨워 눈물 한방울 정도 찔끔 흘릴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이제 정말 가는 거야?”라는 아내의 기습 질문에 난 어정쩡하게 “응!”이라만 답했다. 새벽에 홀로 갯벌에서 묵묵히 꼬막을 잡는 사람에게 시방 지금 꼬막 잡는겨?라고 물었을 때 덤덤하게 대답하는 사람처럼, 난 영국행 비행기 의자에 앉아 "응!"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꿈이 ‘현실’이 되면 처음에는 멍한 거구나! 기쁘고, 좋아하고, 날뛰고, 흥분하려면 먼저 꿈속에서 깨어나야 하는 거구나! 정신차리자! 짝짝짝.
잠에서 깨어보니 아내는 검지 손가락만 한 미니 캠코더를 보며 연신 헤헤거리고 있었다. 아내는 퇴사할 때 노스페이스 모자, 팀원들이 써 준 롤링페이퍼, 멀티 어댑터, 그리고 저 비싼 미니 캠코더를 받았다. 내가 받은 것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목각인형 달랑 하나! 퇴사할 때는 모든 게 다 고맙고 배려처럼 느껴졌는데 아내의 진심 어린 ‘값 비싼’ 선물들을 보자 갑자기 회사 동료들에게 묻고 싶어 졌다. 그게 최선이었냐고!
12시간 반 만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탔다. 연어들처럼 시차를 거꾸로 거슬러 온 상태라 배낭을 메고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건너편의 20대 게이 커플이 긴 혀를 칼처럼 뽑아 전투적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고 한국을 떠난 게 실감 났다.
“아일랜드에서 6개월 어학연수를 하다가 런던이 너무 오고 싶어 이곳에 왔어요. 물가가 워낙 비싸서 지금은 한인 민박에서 스태프로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죠”
“장교 입대하기 전에 절친과 함께 한 달간 유럽여행을 하러 왔어요. 그런데 오자 마자 공항에서 배낭이 나오지 않아 현재 멘붕상태이예요. 현금이 배낭에 다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찾을 수 있겠죠?”
한인 민박에서 만난 청춘들의 설레는 목소리와 미래 계획을 듣고 있자니 좋아 보였다. 아니, 부러웠다. 그 미소가, 그 꿈이, 그 청춘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가하다’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실제 ‘청춘’들과 계급장 떼고, 경력 떼고, 나이 떼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해보면 이 문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금방 알게 된다. 청춘은 보고만 있어도 눈부시다.
2년간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여행 중에 다치면 어떡하지? 큰 소리 뻥뻥 쳤는데 몇 개월 만에 갑자기 여행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갔다 와서는 뭐하지? 즐길 수 있을까? 그만! 그런 걱정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내 앞에 주어진 2년 간의 새하얀 캠퍼스에 어떤 그림을 그릴 지에 집중하자.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늘보며 크게 웃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아!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살아 돌아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