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첫사랑 고백할 때도 이렇게 떨렸을까? 차 키를 받는 순간 심장은 농구공처럼 쿵쿵쿵 뛰었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며 하얀 입김이 피어 나왔다. 난 초보운전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무 살에 면허를 따서 21년간 무사고 장롱면허 운전자인 동시에 지금까지 내 명의로 된 차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5년 전 제주도에서 운전했던 경험이 마지막이었는데 그때 후진을 잘못해 아내와 함께 제주도 푸른 바다로 잠수할 뻔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차로 다가갈 때마다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떨리고 식은땀 나고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지만 할 수 있다고! 침착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아이 깜짝이야!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 위치 확인 오케이! 왼쪽 깜빡이, 오른쪽 깜빡이 동작 확인 오케이! 주유구 열기 오케이! 비상등 버튼 동작 확인 오케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자 차가 움직이면서 빠지직 빠지직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차 키가 빠지질 않아!
몇 번이나 키를 잡아당겼지만 빠지질 않았다. 좀 더 세게 잡아당겨야 하나? 끙끙거리며 잡아당겼지만 헛수고였다. 이러다간 키 빼다가 얼굴이 터지거나 똥을 먼저 쌀 것 같다. 네이버에 접속해 차 키 빼는 방법을 검색했다. 당황해서였을까? 글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듯 한참을 키를 잡고 씨름을 하다가 우연히 키 부근을 누르면서 옆으로 돌렸는데 개구리 뒷다리가 나오듯 쏙~ 빠지는 차 키! 하하하. 누르고 돌려서 키를 빼는 거구나! 무식하게 힘으로 키를 잡아당기는게아니라!
주유구가 안 열려요!
주유를 하기 위해 차 밖으로 나가 주유구 뚜껑을 돌렸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주유구가 드드득! 드드득! 이빨 가는 소리만 나고 열리지 않았다. 이것도 무슨 기술이 필요한 건가? 기술이 어딨어! 그냥 좀 더 열심히 좀 더 세게 돌리면 되는 거지! 어림도 없었다. 주유구는 내 바람과 달리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유소에서 폼 나게 주유한 후 아내에게 멋지게 미소 한번 날려주고 싶었는데 현실은 키 빼다 얼굴 터질 뻔했고 주유구는 드드득 드드득 이빨 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진정 공고를 나오고 공대를 나오고 공대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맞기는 한 걸까? 문득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이러다간 주유소에서 날을 새거나 아내에게 급격한 우울증이 올 것 같아 편의점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편의점 아저씨는 ‘넌 도대체 어느 별에서...’라는 표정을 지으며 거침없이 주유구 뚜껑을 열어젖혔다. 뚜껑도 차 키 빼는 것처럼 누르면서 돌리는 거구나. 누르면서! 그는 꿀렁꿀렁 기름을 다 넣은 후 나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내가 아내 앞에서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미소'였다.
다행히 도로에 차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눈이 왔다가 금세 바람이 부는 광년이가 ‘엄마!’할 날씨였다. 한참 동안 평지를 달리다 언덕을 넘고 속도를 줄이며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차 뒤쪽에서 훅! 하는 장풍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 뒤쪽이 반대편 차선을 넘나들며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이 여행을 위해 3년을 준비했다. 악착같이 살았다. 회사를 다니며 주말 알바를 했고 두더지처럼 냉장고 안의 음식을 다 파먹을 때까지 마트에 가지 않았다. 회사는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그렇게 3년간 돈을 모아 상가를 사고 퇴사를 하고 송별회를 하고 고작 5일간 영국 여행을 한 게 다인데 이곳에 와서 언덕 하나 넘다가 장풍 한 대 맞고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건가? 아직 오로라도 못 봤고 우유니도 못 갔고 마추픽추도 못 갔고 아르헨티나 소고기, 와인도 못 먹었는데... 지금 브레이크 밟으면 분명히 차가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 거야! 힘들어도 좀 참자. 차로 보드 탄다고 생각하자. 핸들을 꽉 잡고 짧지만 아득하고 시간을 버티자 흰둥이 스포티지는 무슨 일 있었어?라고 말하듯 남은 내리막길을 부드럽게 내달렸다.
오빠! 나 진짜 죽는 알았어!
난 목구멍으로 튀어나온 삼장을 다리 밑에서 찾고 있었다니까! 하하하.
‘달나라에 폭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굴포스의 웅장한 폭포 앞에서 우린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끙끙’거렸다. 폭포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짙은 물보라가 만들어냈고 천둥 같은 소리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비현실적이다. 분명 눈으로 폭포를 똑바로 정확히 째려보고 있는데 끝없이 펼쳐진 눈들과 두께를 알 수 없는 얼음 사이에서 굉음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폭포 앞에서 언어는 쓸모없는 도구였고 거추장스러웠으며 인간은 단지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한잔 할래?
유황 물로 샤워한 후 그 사이 돌고래처럼 미끌미끌해진 피부를 신기해하며 귀한 고로쇠 물을 먹듯 보드카를 아내와 홀짝거리고 있는데 도리토리에(공동 침실)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비어있는 침대 중에 하나는 내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네덜란드에서 왔고 지금 아이슬란드 여행 한지 일주일 됐는데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다니고 있어”
토끼눈을 하고 다시 물었지만 그는 분명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전 11시에 일출이 시작되고 오후 5시면 컴컴해지는 이 겨울에 그는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 겨울 평균 온도는 영하 3도로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언제나 미친바람과 눈보라가 불어 대고 겨울에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기 때문에 히치히이킹을 하기에는 최악이다. 믿기지 않아서 어디서 하냐고 묻자 주로 주유소나 대형마트 앞에서 한다고 했다. 갑자기 그가 좀 대단해 보였다.
“숙박은 주로 카우치서핑에서 하는데 오늘은 호스트를 찾지 못해서 이곳 호스텔에 왔어”
이 친구가 오늘 우리 앞에서 멋있고 드라마틱하게 보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우리도 아이슬란드에서 카우치서핑 - 소파(couch)를 찾아다니는 것(surfing)을 뜻하는 말로 여행자들에게 자신의 소파를 제공하고 사람을 호스트라 부르고 그 소파에서 ‘무료’로 자는 사람을 서퍼라 부른다. www.couchsurfing.com에서 예약 및 소통을 할 수 있다 – 을 하기 위해 한국에 있을 때부터 몇몇의 호스트들에게 요청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여행 중인데 머물 수 있냐고 머물게 되면 최선을 다해 웃겨주겠다!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만나면 정말로 재미있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스트들은 답변이 없거나 거절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보란 듯이 카우치서핑을 하며 다니고 있었다.
“한 번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탔는데 운전사가 마약상인 거야! 대마초를 피우면서 운전을 하는데 나한테 계속 펴보라고 하는 거야. 대마초를 피면서 설렁설렁 운전하는 것도 떨리는데... 난 그 와중에 개를 무릎에 올려놓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야 했어. 그가 자신의 개를 보고 있으라고 했거든. 빙판길 보랴 대마초 권유 거부하랴 개 쓰다듬으랴 난 아직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가 않아”
이 친구는 여행 온 게 아니라 아이슬란드에서 서커스를 하러 왔구먼! 빙판길에 대마초와 개라니! 낄낄거리며 한참을 웃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런 고된 여행을 자처하는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내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어”
멋졌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왜소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열망은 우리를 압도했다. 앞으로 우린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될까? 어떤 한계에 부딪치게 될까? 몇 년간 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자니 내일이 기다려지고 순간순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여행 끝나고 나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확! 젊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 행복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