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오로라다!

아이슬란드, 보르가르네스

by 월세부부

2시간 만에 도착한 보르가르네스는 작은 도시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도시 정면에는 입을 꾹 다문 푸른 바다가 보였다. 대형마트 앞에서 홀란드를 내려줬다. 그는 이런 곳이 히치하이킹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고 하면서 연신 “땡큐 소 머치”를 말했고 난 그와 세차게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매번 도움만 받다가 도움을 주니 마음속에서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났다.

홀란드는 여행 첫날 만났던, 그러니까 이 겨울에 카우치서핑과 히치하이킹으로 아이슬란드 여행을 한다는 그 친구였다.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제 장장 5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나오는데 붉은 수염이 이쁘게 난 한 외국인 청년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난 귀신을 본 것처럼 유...유...유아?하며 말을 더듬었고 그는 이 동양인 왜 이래? 하는 눈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나를 알아봤는지 금세 얼굴이 백열등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아이슬란드 최 서쪽 오지마을에서 말도 안 되는 상봉이었지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인연이 연인이 되는.

그 사이 홀란드의 이야기보따리는 제법 묵직해져 있었다. 카우치서핑 호스트와 함께한 뜻하지 않았던 동굴 투어, 비크(Vik)에서 이곳 리프까지 8번에 걸쳐 히치하이킹해서 온 경험담 등 꺼내는 이야기들마다 어찌나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하던지 듣는 내내 LTE급으로 빵빵 터졌다. 그러던 중 홀란드가 소수의 아이슬란드인이 먹는다는 발효된(삭힌) 상어, 즉 ‘하칼’을 먹어봤다고 하면서 자신이 먹는 과정을 찍은 동영상을 보여줬다. 두려워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칼을 뜯어먹는 홀란드 동영상을 보자 문득 ‘홍어’가 떠올랐다. 아이슬란드에서 홍어를 설명하게 될 줄이야?라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그러나 기분 좋은 목소리로 홍어부터 삼합까지 침 튀기 겨가며 설명했고 대화 끝자락에는 홍어와 막걸리가 없어 섭섭하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홀란드와 숙소 직원인 남아공은 한국에도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오늘도 어김없이 오로라를 기다렸다.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때 마침 오로라 지수도 3이라(9가 최고) 기대해 볼만 했다. 우린 밤하늘에 낚싯줄을 던져놓은 강태공처럼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섞은 술을 홀짝거리며 틈틈이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11시쯤이었나? 창문 너머에 슈렉 색깔이 하늘에서 아른거렸다. 이건 분명 오로라다! 난 정신없이 옷을 끼어 입으며 오로라!라고 짧게 외쳤고 아내도 내 놀람에 허둥대며 옷을 입었다. 연두색이 찰랑거리는 밤하늘을 봤다.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오로라가 맞았다. 검은 물감같은 밤하늘 위에 떠서 부드럽게 손짓하는 오로라를 보며 우린 빛에 홀린 사람처럼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둣빛 오로라의 춤사위를 보며 감탄하고 감동하고 사진 찍고 대박! 을 외쳤다. 그것도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이래서 오로라! 오로라! 하는구나. 오로라를 보는 순간 기존에 봤던 설산 폭포 그 모든 절경들이 순식간에 잊힌다. 순식간에...

아이슬란드에 와서 총 세 번의 오로라를 봤다. 첫 번째는 수줍은 짝사랑 초기처럼 풋풋했고 두 번째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 같았고 오늘 본 오로라는 불꽃 튀는 그래서 결국 한 줌의 재로 남겨질 사랑처럼 뜨겁고 강렬했다. 저 신비스러운 오로라에 비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저 수많은 별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런데 우리의 걱정거리와 고민은 우주보다 크고 거대하다. 오로라를 보며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했다. 어제보다 걱정 덜하고 어제보다 한번 더 웃는 것. 인생, 원웨이 티켓이다.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환불 안되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뿐이다. 죽는 날까지 앞으로 나아가거나 멈추거나. 그러니 세상 걱정 다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진지할 필요도 없고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바람을 타는 먼지처럼 가볍게 움직이면 된다.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