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세이디스피외르뒤르
새벽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은 눈을 뜨라고 정신 차리라고 내 볼을 사정없이 때렸다. 아내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오로라’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왜 이렇게 오로라를 보려고 하는 걸까? 우린 왜 이렇게 오로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고 아이슬란드 여행의 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간 우리가 봤던 아이슬란드 겨울 경치는 우주복이 없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고 다른 행성 같았다. 입이 쫘악! 벌어지는 푸른 빙하가 있었고 보석 바가 생각나는 얼음들이 바다 주변을 아무렇게 뒹굴고 있었고 눈 덮인 산 뒤에 불시착한 우주선이 있을 것 같은 그런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아이슬란드였다.
오늘 운전해야 할 거리는 120km 남짓으로 지금까지 왔던 길 중에 가장 짧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몸과 마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만큼 가벼웠다. 게임 속에서나 볼 법한 근사한 경치 속에서 운전이 시작됐다. 숙소에 가기 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스케이드보드 타고 미친 듯이 내려가 들렸던 마을에 가기로 했다. 아내는 내 긴장한 상태가 걱정이 됐는지 안전운전을 재차 강조했다.
도로 초입부터 얼음길이 시작됐다. 끝나겠지, 하는 내 바람과 달리 얼음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긴 터널을 지나고 나자 뱀처럼 배배 꼬여있는 도로가 눈과 얼음을 한껏 머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제한 표시 30km. 난 뱀 같은 도로에 먹히지 않기 위해 앞 유리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운전을 했고 아내는 천길 낭떨어지를 보며 당장이라도 애를 낳을 것처럼 하악 하악 소리를 내며 이 상황을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제처럼 죽기 싫으면!
어제 운전은 순조로웠다. 초반부터 뷰티풀 하고 언빌리버블 한 경치가 계속됐다. 종종 라면 면발처럼 꼬불꼬불한 커브길이 나왔지만 며칠간의 운전 덕분인지 이제는 음악을 들으며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좀 나른해졌고 멍하니 운전을 하고 있는데 비명에 가까운 오빠! 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멀지 않은 정면에는 도로 주변에 순록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 유난히 큰 순록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었다.
허둥지둥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차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급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더 깊숙이 밟고 싶었지만 그러면 차가 빙글빙글 돌다가 순록과 함께 사이좋게 손 꼭 붙잡고 하늘나라로 갈 것 같아 꾹 참았다. 순록은 정말이지 간이 떨어질 정도로 간발의 차이로 우리를 비껴나갔고 난 이 상황을 모면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 욕을 퍼부었다. 이런 고기를 다져서 미트볼을 해가지고...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생각해보니 순록이 도로에 있는 게 잘못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이슬란드를 고작 몇 주간 여행하는 여행자이고 순록은 여기서 사는 동물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방인인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였을까?
오빠! 하고 아내가 절규했던 상황으로 기억을 다시 돌렸다. 난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순록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머리 속은 어제 숙소에 대한 불만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순록아! 욕해서 미안. 내가 순간 놀라서 그랬어. 놀라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영화감독을 욕하며 임산부들이나 할법한 라마즈 호흡법을 하고 있는 아내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난 끝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마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소 허무한 표정으로 정면에 보이는 시퍼런 바다를 보며 난 이미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아내의 하악 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침을 꼴깍거리며 목구멍으로 넘겨야 할까? 다행히 내려올 때 보다 올라가는 길은 덜 힘들었다. 거북이보다 천천히 올라갔고 반대편에서 차가 내려오면 거의 정지하다시피 속도를 줄였다.
녹초가 다 돼 도착한 숙소는 故앙드레김이 왔어도 만족할 정도로 어메이징 하고 환타스틱 하고 엘레강스했다. 점심엔 새우맛 태국 라면을 저녁엔 냄비밥을 해서 누룽지를 끓여먹는데 어찌나 구수하던지 이곳이 아이슬란드라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큰 마음먹고 요리하는데 꼭 필요한 기름, 후추, 소금을 샀다.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랩이 튀어나왔다.
우린 기름 없어 버터로 계란 프라이 해 먹었고,
우린 기름 없어 버터로 소시지 구워 먹었고,
우린 기름 없어 버터로 스파게티 해 먹었다.
며칠간 운전하면서 이제 웬만한 경험은 다했다. 눈길도 달려봤고 얼음길도 달려봤고 빗길도 달려봤고 터널도 통과해봤고 미친바람도 맞으며 달랴봤고 동물도 피하면서 달려봤다. 내일은 또 어떤 길들이 펼쳐질까? 오로라는 볼 수 있을까? 궁금하고 떨린다.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