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
10여 년 전에 읽었던 <<덕혜옹주>>가 처가댁
서재에 가지런히 꽂혀있어 무작정 가져왔다.
그리고 며칠 전에 다시 읽었다.
책 내용은 같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달랐다.
30대에 읽었을 때는 문장이 읽는 대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면
이번엔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지고
때로는 가슴속 어딘가에 조용히 갈무리 됐다.
책을 읽다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단이 있어 적었다.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일제 강점기에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난 공주도 아니었던 덕혜옹주.
태어난 지 8년 만에 아버지 고종이 공식적으로는 뇌졸증 사망, 이라고 했으나 일본 독살설,
14살에 일본 학습원으로 강제 연행,
20살에 일본 백작과 강제 결혼,
이후 낳은 딸은 자살, 본인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15년간 정신병원의 삶.
37년 만에 대한민국에 돌아왔으나 자신을 마중 나온 유모마저 기억하지 못했던 삶.
이 책을 읽으며 나라면 어땠을까?를 수십 번 자문했다.
나라면....
내가 만약 덕혜옹주였다면
난 삶의 끈을 끝까지 잡지 못하고 어느 시점에 삶을 놓아버렸을 것 같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도 무겁고 고단했던 삶이었기에.
책 끝자락에 공주의 덕에 대한 설명을 읽고 깜짝 놀랐다.
40대가 돼서 비로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내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선조들은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주의 덕을 아느냐.
온순하고 공경하고 너그러워 편협함이 없으며
미움을 스스로 품어 더럽거나 좁아지지 않을 것이며......
본 것을 본 대로 두어두고,
들은 것은 들은 것에 놓아두며,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며......
늘 주위를 조화시켜 착함을 이룰지니라......
위 처럼만 산다면 건물, 주식, 심지어 돈이 없어도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알로하, 나의 엄마들>>라는 책도 함께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였다.
<<덕혜옹주>>는 1909년에,
<<알로하, 나의 엄마들>>는 1917년으로 모두 일제강점기 시대였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는 시작부터 포와(하와이)라는 단어가 나와 뭐지?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은 하와이에서 날아온 남자
사진 한 장만 보고 결혼을 결정하고 이민을 위해 배를 탄다(그들을 사진신부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은 하와이에 도착해 영어 한마디 모르는 낯선 환경에서
한 달에 20-30달러를 벌기 위해 타들어가는 햇볕 속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채찍을 맞기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며 삶의 끈을 꽉 부여잡고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들이 절망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다가오는 삶의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넘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같은 시대, 전혀 다른 이야기와 결말,
최근 코로나로 답답하고 예민해져 있는 삶에 대해 두 권의 책은 나에게 짧은 조언을 해준 것 같다.
인생은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당당하게 부딪히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내 부모가,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