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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Jun 08. 2018

생각의 미래, 예술의 미래

생각의 미래, 예술의 미래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 <Also sprach Zarathustra>, Friedrich Nietzsche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에는 무엇을 쓸까 긴 시간 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사실 이 연재,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글을 구상한 처음 순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선 에필로그가 가장 먼저 쓰이고, 프롤로그가 가장 마지막에 쓰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마지막에는 제가 가장 쓰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과 철학에 관해서 말이죠.      


저도 예술(그중에서도 순수미술인 서양화)을 전공하였고, 철학에 관한 책도 몇 권 썼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그 두 가지에 과도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며, (철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죠. 물론 이것은 예술과 철학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이라는 행위는 뭔가 성스럽고 초월적이며, 철학함은 어딘가 고고하고 정의로운 행위일 것으로 여겨지죠.     


하지만, 다 같은 인간입니다. 

니체도 인간이고, 피카소도 인간이고, 칸트도 인간이죠.      


아, 물론 개개인이 다 같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르고, 그러므로 개개인은 고귀한 존재이지만, 또한 다시 그러므로 그 누가 특별히 뛰어나고 월등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고흐의 삶이 처연했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하며, 니체의 삶이 격정적이라면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고흐의 영혼만큼이나 우리의 영혼 역시 고귀하죠.      


저는 예술이란 그런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하죠. 작가의 생각이 이렇고 저렇고 하기보다는, 그 작품을 통해 움직이는 나의 감동과, 그 책을 읽고 깨지는 나의 고정관념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에세이 <저자의 죽음>에서 말했던 것처럼, 저자의 죽음을 통해 탄생하는 것은 독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죽고 관객이 탄생해야 하며, 

작품은 죽고, 내가 태어나야 하죠.    

  


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흐의 작품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 그림을 볼 때는 이런저런 감정을 가져야 하고, 요런 감동을 느껴야 한다.”라고 누군가에게 강요하면 안 되는 것처럼, 철학 역시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한 철학자의 텍스트에 얽매여 “이 책은 반드시 이런저런 순서로 이렇게 저렇게 읽어야 하고, 누구 읽기 전에는 누구를 꼭 읽어야 하며, 이 단어는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요렇게 해석해야만 하고...” 등등, 독해를 강요하는 것은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도구가 되었어야 할 철학으로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죠.      

물론, 이런 지식과 순서와 룰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만 읽고, 그런 감동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것이죠. 똑같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도 없겠죠. 검색하면 되니까요. 


이제 책에서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캔버스에서 시선을 돌려 내 옆 사람을 보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보고, 죽어가는 세상을 봐야할 때입니다. 

길은 책 속에 있다고 하지만, 책 속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거기에 길이 있을 턱이 없죠. 언제나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발끝에 있습니다. 책은 다만 그저 힌트, 그것도 무척 희미하고, 뿌옇고, 애매모호한 힌트만을 줄뿐입니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죠. 다만, 예술과 철학이 다른 점이라면, 적어도 예술은 철학처럼, 이래야만 한다를 말하진 않는다는 것이죠. 

그나마 덜 계몽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문학책 좀 읽었다고, 철학책 좀 읽었다고, 자기개발(혹은 자기계발)서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건 마치 “모든 것에는 가치가 있고, 그러므로 다양성은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데, 너(자기개발 or 계발서)는 그 다양성에 속하지 않아! (+내 말만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이 모순성을 모른다면 나이브한 것일 테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자기기만적인 행위일테지요.      


세상에는 미적분이나 맥스웰 방정식이 필요한 삶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에는 더하기 빼기로 충분한 삶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사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죠.     


그 잘난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사회학이니, 들뢰즈니 라캉이니 하버마스니 푸코니, 하는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필요치 않고, 있어 봐야 그저 또 하나의 공해일 뿐인 사람들이, 세상을 이루는 절대다수, 즉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오늘, 지금, 당장 한순간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철학 좀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짜인 자기계발서의 그저 그런 말들이 더 절실할 수도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보다 <슬램덩크>에, <드래곤볼>에,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에 위안을 얻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삶의 희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différance와 différence의 구분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데리다의 말은 그다지 필요도 없고, 그러니 관심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이라는 말이 언제나 그렇듯, 언제까지고 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아마 그렇게 평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보다 에어컨의 리모컨 사용설명서가 더 쓸모 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라마톨로지>를 읽고, <말과 사물>을 읽고,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민중이니 시민이니 하는 말을 달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놓곤 정작 시민과 민중이 원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누구인지, 그 누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밥을 잘 사준다는 건지, 그리고 왜 우리가 그 누나를 좋아하는지에는 관심 없고, 그저 "그건 쓰레기야! 너는 이걸 알아야만 해"라고 들이밉니다.      


철학도 예술도 죽어야 합니다.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 씌워져 있던 이미지가 죽어야 하죠. 

그리고 철학도, 예술도 우리 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 글도 결국에는 “우리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글(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이 될 겁니다. 이것은 결국 저자인 “나”의 글이고, “나”의 삶이니까요. 독자 여러분들의 삶을 제가 알 턱이 없죠. 그것은 어떤 저자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러니 “내가 다 아니 다들 이렇게 살아라!”라는 말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 보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예술과 철학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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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눈 철학의 말> 연재는 추후 9월경에 내용과 이미지를 추가/보완하여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책에서는 댓글로 질문해주셨던 부분이나 의문을 가지셨던 부분들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끝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자주 연재에 늦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문성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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