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준 Apr 06. 2018

가짜와 가짜: 옥자와 이방인, 그리고 패트리샤 피치니니

가짜와 가짜: 옥자와 이방인, 그리고 패트리샤 피치니니

          

<옥자>, 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봉준호”, 라는 감독의 이름과 “넷플릭스”, 라는 매체의 유명세로 눈길을 끌었던 영화죠.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잘생긴 소설가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입니다. 

전혀 달라 보이고, 실제로도 전혀 다른 두 작품이지만, <옥자>를 보고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무엇도 아닌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였습니다.     

 


옥자는 뫼르소입니다. 

이 난처하고도 직접적인 비유는 그러므로 적확합니다. 옥자는 뫼르소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옥자로 살고 싶었던 존재였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옥자와 뫼르소를 ‘존재’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기존의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입니다.      


지칭 불가능한 존재.      


그것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이며, 이 지점에 오늘의 작품인 패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옥자와 뫼르소, 그리고 패트리샤 피치니니 작품의 지칭 불가능함이 이번 연재의 주제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정 반대에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진짜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1)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보려 애씁니다. 

학교에서는 정답을 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러니 아이들은 알아보기 위해 애쓰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맙니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즉 점수로 측정 가능한 사람이 되어야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를 교정하고 정돈하여, 해석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아이들로 바꾸는 것이 교육이며,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이런 알아보려 함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극단적인 게 문제이죠. 모든 것은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배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을 예측 가능성, 지칭 가능성의 범주 안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죠.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말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알아보는 과정입니다. 뭐가 뭔지 모르는 꽃 더미에서 한 꽃을 “꽃”이라 부름으로써 그 꽃이 되는 과정을 아름 다운 언어로 풀어낸 것이죠. 그래야만 한 꽃은 “꽃”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꽃은 의미를 갖게 된다고요. 알아볼 수 있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방식이죠. 이 말은 곧, 모르는 건 무가치한 타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걸 조금 삐딱하게 생각해 보자면, 애당초 꽃은 이름을 불러 주기 이전에도 꽃이었고, 이름을 불러준 이후에도 꽃이었습니다. 전혀 변함이 없죠. 그래서 시인은 거기에 한정을 붙입니다. "나"와 "그"라는 한정이죠. 이름을 불러줘서 그게 꽃이 되었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나에게"와서 꽃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와 "그"라는 한정을 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폭력적으로, 

모르는 대상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보고, 그러므로 제거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게 문제죠.  



옥자와 뫼르소는 "그 과 정반대에 놓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인이라고 범주화되는 우리의 시각으로 보자면 도대체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뫼르소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그 상태(흔히 말하는 이상한 사람)로 남았고, 옥자는 슈퍼돼지가 아니라 그저 산골의 옥자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인식되지 않는다는 그 당혹감으로서만 그들 자신일 수 있는 존재였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흔히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당혹감이 순순히 받아들여지는 사회란 없습니다. 

옥자도 뫼르소도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어떻게든, 김춘수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알아보고 불러야 하는 것, 즉 우리의 이해 가능 범주 안으로 편입시켜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죠. 그렇지 못한 존재는 우리에게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이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이죠. 

불안은 해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추방되든, 개종되든, 혹은 죽어야 합니다. 

뫼르소는 어른 소설이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선택지를 선택했다면, 옥자는 관람객의 연령대의 한계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겠죠.      


여하튼, 둘은 그대로 남아있기 힘듭니다. 

이방인은 우리 사회의 진짜 구성원이 아닌 가짜이며, 가짜란, 긍정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도처에는 언제나 이방인, 즉 가짜가 존재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아니,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모두는 모두에게 언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내가 전혀 몰랐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녀가 함께 여행을 가면 상대의 그 낯섦에 충격을 받고, 싸우거나, 실망하거나, 혹은 반대로 감탄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런데 타자는 동시에 바로 그 타자성 때문에 언제나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타자를 통해 나의 위치와 존재를 확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 풍경이 가도 가도 똑같은 설원이나 사막에서는 길을 잃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 곳에서는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언제나 나와 다른 존재, 타자, 이방인, 혹은 가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짜로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자의 모습을 통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낯섦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끔찍할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반대로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죠. 그래서 랭보의 말처럼, 언제나 나는 타자(Je est un Autre)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라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짜-타자를 대하는 고민은 진짜-나를 알아가기 위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2) 예술가들이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


예술가들은 그 민감한 더듬이로 이런 문제들을 먼저 포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감각은 말보다 먼저 그 문제를 더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표현하죠. 그 대표적인 작가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패트리샤 피치니니입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 <젊은 가족 The Young Family>, 2002

  

그녀의 대표작인 <젊은 가족 The Young Family>을 보죠. 경계가 모호한 생명체가 누워 있습니다. 한 무리의 돼지 가족처럼 생긴 그 생명체들은 얼핏 보면 돼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돼지의 모습보다 우리와 닮은 존재, 즉 ‘인간’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닮은 것들을 찾아내게끔 패턴화 되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기에서 닮음을 찾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납작한 코와 펄럭이는 귀를 가졌지만, 주름지고 쳐진 인간의 피부와 인간보다 더 인간을 닮은 눈빛은, 그 생명을 그저 하나의 객관적 물질로 치환할 수 없게 만듭니다. 마치 옥자처럼, 자의식을 가진듯한 어미의 지친 눈빛은 우리에게 거북함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을 어떤 일본 학자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이름 짓기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그 닮음, 자의식의 공통 감은 친숙한 편안함보다 오히려 낯선 불편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입안의 가시처럼,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죠. 

아파 봐야 아는 것입니다. 혓바늘이 돋아야 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코가 막혀봐야 코가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이 침침해 봐야 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불편해 봐야 나의 일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편해야 합니다. 

이 불편함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하는데, 그게 도무지 뭔지 모르겠으니, 비로소 고민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고민을 하기 때문에 그 아픈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아프니 그것도 나, 혹은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자에 대한 고민은 이 불편함에서 비롯되고, 결국에는 그 타자들이그 가짜가사실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였음을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이 그렇습니다. 

그의 작품은 불편합니다. 요즘 말로는 “끔찍한 혼종”이죠.     


 

출처: www.visitvictoria.com


출처: www.qagoma.qld.gov.au


출처: www.acca.melbourne


하지만, 그의 혼종은 이방인이 그렇듯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도와주죠. 


제가 가르쳤던 아이 중에 그런 아이가 있었습니다. 

곱슬머리에 피부가 까만 소녀가 였죠. 이 소녀는 아이돌보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더 많고, 시끌벅적한 교실보다 조용한 도서관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이 특징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아이를 타자이자 이방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이 아이는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에 같아져야 하는 존재였죠. 이 아이도 연예인을 좋아해야 했고, 자기들과 함께 떠들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과 다른 존재가 합당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적 당위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앙인 집단에 무신론자가 끼어들게 되면 그 질서가 흔들리는 것처럼, 자신과 다른 존재가 합당하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다른 것은 언제나 이렇게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다름은 공격의 대상이 되죠. 그리고 공격의 대상이 되면 모든 것이 고까워 보이는 법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것부터 양념 통닭을 손으로 먹는 소녀의 사소한 행동마저도 아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이 소녀는, 선천적인 그 곱슬머리조차 이방인의 징표가 되었죠. 

      

하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우리였습니다. 어쩌면, 그만한 차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 협소함을 절절히 보여주는 존재였죠. 


피치니니는 이러한 우리의 낯선 모습, 하지만 여전히 진짜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주 효과적으로 오브제를 다룹니다. 우리와 닮았지만 다른,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불편한 생명체를 창조해 내곤, 그걸 우리에게 들이밀어 불편하게 만듭니다. 마치 아이들이 그 소녀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 것처럼 말이죠.  


옥자와 뫼르소는 바로 여기에서 패트리샤 피치니니와 같이 놓여있습니다. 

바로, 이방인이라는 그 자체의 정체성으로 말이죠.      


그러므로 옥자는 뫼르소이며 동시에 젊은, 즉 새로운 우리의 가족 입니다.


우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가족 말이죠. 

 

이전 15화 진짜와 진짜: 임마누엘 칸트와 쿠르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