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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Mar 09. 2018

새로운 눈 새로운 세계: 폴 세잔과 데이비드 호크니

새로운 눈 새로운 세계: 폴 세잔과 데이비드 호크니



미술사란 뭘까요?

우리는 흔히 미술의 역사를 테크닉의 발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한 회화적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 작품을 중세 시대의 작품보다 “잘 그린 것”으로 여깁니다.

중세 그림: <Maestà>,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1308~1311)
르네상스 그림: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하지만, 미술 양식의 변화를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많은 없습니다. 단순한 손재주, 즉 기술의 발전 이전에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천 과정이 바로 미술의 역사죠.

오히려,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의 테크닉은 바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요구에 의해서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세상을 직선으로 본다면 직선을 그리기 위해 고민하고, 그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곧은 자를 고안해낼 수도 있고, 혹은 자 없이도 선을 곧게 그릴 수 있도록 훈련하겠죠. 반대로, 세상이 동그라미로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동그라미를 그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테크닉이 미술사의 발전을 이끌었다기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테크닉의 변화를 이끌었고, 그 테크닉의 변화를 미술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유용한 방법 중 하나 입니다. 한 작가를 만날 때, 그의 어떤 작품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작가 전체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까지 이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본다면, 작품에는 그 시대의 세계관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있죠.


예컨대 앞서 봤던 그림을 다시 한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 1255~1319)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 역시 당시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죠. 아직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바로 전, 이탈리아의 화가인 두치오가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그 옥좌를 둘러싼 성자들을 그린 이 <Maestà>는, 시에나의 보물이라고도 불리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걸작이라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하는 것이죠. 이 그림을 보고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생각은 “이상하다”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쌓아온 미술에 관한 고정관념 때문에 이 그림의 여러 요소에 이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인물의 크기부터 이상합니다.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의 주인공은 가운데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아무래도 여성인 마리아와 아기인 예수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작아야 할 텐데, 오히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크기가 제 마음대로인 그림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틀린 그림”이라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당연합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보니, 크고 작은 게 엄밀히 존재하고, 그러므로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작게 그리는 게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학교에서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치오의 그림은 그와 다르죠. 실제의 크고 작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세 사람이라고 뭐가 크고 뭐가 작은지 모를 리는 없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그려졌을까요? 아마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현대인이라면, 중세 사람들은 그렇게 그릴만한 능력, 즉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책에서나 학교에서나 중세를 암흑시대(dark age), 즉 마녀사냥이나 종교적 도그마로 점철된 모든 비이성적인 시대로 배워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중세를 그렇게 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치오가 크고 작은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기엔, 마리아나 아기 예수를 작게 그리는 것이 더 이상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려야 할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기독교인, 특히 가톨릭인에게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 어떤 존재보다 소중하고 고귀하죠. 중세인들은 오히려 그렇게 중요한 존재를 왜 작게 그려야 하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작기 때문에(작다는 말도 애매하죠. 그저 물리적 크기가 작을 뿐, 이들은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큰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작게 그리는 게 당연하지만, 이들에게 있어 우리가 미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대로"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하지 않으니 그게 기준이 될 이유가 없었죠.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세상은 죽고 나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물질세계의 기준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죠. 그리고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이 세계의 방식대로, 즉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해 고귀한 존재를 작게 그릴 이유가 없었죠.


이런 것은 아이들의 그림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인 아이들에게 엄마를 그려 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나 나무, 집 같은 "기타 등등"보다 엄마를 크게 그립니다. 그리고 엄마 중에서도 얼굴을 가장 크게 그리죠. 아이들이 이렇게 그리는 이유는 앞서 중세인들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크게 그렸던 이유와 같습니다. 그 아이의 세계관에서는 엄마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엄마가 살이 쪘건 날씬하건, 키가 크건 작건 아무 상관없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얼굴이 바로 엄마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세계는 곧 엄마인 것이죠.


두 번째로는 마리아가 앉아있는 옥좌의 모양입니다. 옥좌의 발판을 보면 사다리꼴로 그려져 있죠.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다리꼴 모양의 발판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직사각형의 발판을 그린 것이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라고 직사각형을 사다리꼴로 볼 일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바로 예술의 무서운 점입니다. 어쩌면 고정관념의 무서운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사각형은 아래처럼 그리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직육면체


도대체 이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는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죠. 

이렇게 보이는 걸 어떻게 다르게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중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앞면과 오른쪽면이 보이고, 왼쪽면이 안 보인다고해서 왼쪽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왼쪽면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그럼 중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아니, 왼쪽면이 있다는 걸 아는데 왜 안 그리지?’

라고 말이죠. 

그러니 왼쪽면도 그려야 해서 그림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는 것이죠.


앞서 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대로” 그려야 했죠. 그래서 사실 중세의 미술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이라기보다는 텍스트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이걸 전지적 시점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인간처럼 공간의 제약이 있어 한 시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술에는 그 시대에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무엇을 진짜라고 생각했는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르네상스와 현대의 예술작품에도 마찬가지였죠.


르네상스에 와서 예술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를 발명합니다.

바로, 원근법유화죠.


원근법과 유화의 발명은 곧이어 르네상스로부터 도래한 세계관의 변화를 예술에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아니, 서두에서의 설명처럼, 세계관의 요구가 그 두 가지를 발명하게 했죠.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사회가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점차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제 신처럼 전지적인 시점에서 볼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그림에 인간이 등장합니다. 정확히는 인간의 시점, 원근법이죠.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제 그림은 인간이 보는 대로 그려지게 됩니다. 즉,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르네상스 그림의 목적이 되었죠. 물론, 이때의 보이는 그대로라는 말은, 신이 아닌 인간이 보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렌체 성 요한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만든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언제나 헌신과 수련을 통해 예술을 탐구해 왔다. 자연은 어떤 이치로 움직이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자연에 접근할 수 있을까? 사물의 표면은 어떤 원리로 눈에 와 닿는 것일까? 시력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그리고 주조 예술이나 회화 예술의 이론은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 같은 예술의 기본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 연구했다.”

<Commentarii>,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를 고민한 흔적이죠. 이런 고민의 결과가 마침내 원근법이라는 결과물로 탄생한 것입니다. 물론, 기베르티가 원근법을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원근법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연구가 되었고, 중세에는 아랍으로 넘어가서 계속 전수되어 왔죠. 요컨대 중요한 것은, 원근법 자체가 아니라 바로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원근법을 통해 형태를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게 된 르네상스는 그 표면의 색깔을 포착하는데도 성공합니다. 유화라는 방법으로 말이죠. 유화를 통해 자연 그대로의 색을 낼 수 있게 된 르네상스는 형과 색 두 부분에서 이제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죠.


제가 여기에서 “생각했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근법과 유화가 보이는 그대로 그리게 해줬다는 것은 르네상스의 착각이었죠.


이 착각을 깨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원근법은 지금 우리가 보더라도 너무 완벽해 보이는 기술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죠.  

여기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세잔입니다.


세잔의 자화상


세잔은 독특한 사람들의 집합체인 미술사에서도 특히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네에 대한 열등감과 그에 반비례하는 자존심의 딜레마 때문에 편집증적인 징후를 보이기까지 했던 사람이죠. 하지만 그런 열망과 집착이 그를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한 발견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집착으로 세잔이 천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보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인지에 관한 회의와 새로운 시각성의 발견이 그의 목적이었죠. 


이때 세잔이 딴지 걸었던 ‘세상을 보는 방법’이 바로 르네상스의 원근법이었던 것입니다.


앞서의 설명처럼, 원근법적 시각의 지배는 세잔이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건 세잔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원근법은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죠.


아무튼 세잔은 바로 이 원근법에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그럴까?”하고 말이죠.


과연 우리는 세상을 원근 법대로 보고 있는지 세잔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캐내기 시작합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요.


바로 관찰이죠.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리고 우리의 눈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계속 보면 됩니다. 관찰이죠. 


세잔은 테이블에 놓인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하고, 모델을 같은 포즈로 백 번 이상 서있게 하여 관찰하고, 생트 빅투아르 산을 관찰하기 위해 60번에 걸쳐 산을 오릅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당연하게 원근 법대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소실점을 기준으로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멀리 있는 것은 작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죠. 하지만 세잔이 발견한 것은 크고 작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고정된 시각”이 그의 관심사였죠.

원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시점을 고정시키는 것이죠. 그것도 한 눈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눈은 두 개지만, 원근법은 하나의 눈으로 본 세상이고, 더군다나 고정된 눈으로 본 세상이죠.


원근법의 원리를 실험하는 뒤러의 작품. 벽에 실이 고정되어 있는 점이 화가의 시점이다


그래서 뒤러의 그림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을 연구했던 그림을 보면, 항상 시점이 고정되어 있죠. 그것도 한 점에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은 하나도 아니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죠.

예를 들어 정확한 원근법을 기준으로 그려진 아래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대상을 진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낸 것처럼 보입니다.


<Città Ideali>


중앙의 원형 건물 뒤편으로 수렴되는 소실점을 기준으로 정확한 원근법 하에서 그려진 이 그림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그대로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세상을 볼 수가 없죠. 무엇보다도 우리 눈의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시점이 좁기 때문에 이 전체 장면을 한눈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중앙의 원형 건물을 볼 때의 시각과 좌우의 건물, 그리고 바닥 등 다른 지점을 볼 때마다 우리의 눈동자는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시점이 달라지는 것이죠. 더구나 왼쪽의 회색 건물을 볼 때와 오른쪽의 갈색 건물을 볼 때는 고개까지 완전히 돌려야할 정도입니다. 즉, 고정된 시점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세잔은 이 지점에 착안했습니다.

원근법이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이렇게 볼 것이라는 생각, 즉 착각일 뿐이라는 거죠. “여러 가지 시각을 조합해 보았더니 이렇게 보일 것이다”라고 착각하는 것이 원근법입니다. 너무나 오래,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이렇게 본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그렇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단순이 우리 머릿속에서 조합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고, 더구나 두 개이죠.


이 학습된 착각을 벗어내기 위해, 수백 년 간 세뇌된 ‘세상을 보는 눈’을 씻어내기 위해 세잔은 그렇게도 대상을 관찰했던 것입니다. 보고, 보고, 또 보고, 결국에는 발견한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보는 우리의 진짜 시점은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 세잔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시점을 그림에 그려 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과를 그릴 때는 사과를 보는 시점대로, 바닥을 그릴 때는 고개를 숙여서 바닥을 보는 그 시점 그대로, 그림에 합쳐 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잔의 그림에는 원근법처럼 하나의 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시점이 존재합니다. 테이블을 보는 시점과 사과를 보는 시점, 그리고 접시를 보는 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세잔은 그것을 다르게 그립니다. 그래서 한 그림 속에 있는 정물들의 기울기가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 간단한 작업이죠. 그저, “보이는 대로”만 그리면 되는 겁니다.

다만, 진리처럼 여겨져 왔던 오래된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지 못하고, 아는 대로만 봐 왔던 것이죠.


바로 이것이 세잔의 회의입니다.

우리가 너무너무너무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게 당연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바로 그 “눈”을 의심한 것이죠.

이건 사실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우리의 감각까지도 지배하는 강력한 고정관념을 벗어버린 일이니까 말이죠.


“세상을 이대로 보아라”

“세상은 이런 것이다”

“삶은 이래야만 한다”


라는 모든 기준도 사실은 그저 하나의 시각일 뿐이고,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세잔은 그림으로 그대로 보여줍니다.


(분량상 데이비드 호크니에 관한 내용은 출판되는 책에 수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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