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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Mar 02. 2018

낯선 몸, 새로운 정체성: 모나 하툼과 바바라 쿠르거

낯선 몸, 새로운 정체성: 모나 하툼과 바바라 쿠르거


<호문쿨루스>
“폼 재지 마. 인간이란 외양이야. 인간은 내면이다, 정신이다. 그딴 소리 집어치우라고 해... 이 인간이란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만지고, 맛보고,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거야. 비로소 ‘인간’인 거지. 정신이 조종할 수 있는 이 ‘인간의 형태를 가진 살덩이’가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거짓말을 하는 거고, 육체가 있으니까 사람을 다치게 하고, 눈이 있기에 남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어..., 형태가 있기 때문에 불과 몇 mm짜리의 여드름 하나에 고민하고, 불과 몇 cm의 얼굴이나 신체의 불균형에 신경질을 내고, 고작 앞니 한 개의 결여에 당황하고 아우성치지.... 몇 mm 더 큰 눈에 시선이 몰리고, 몇 mm 더 큰 코에 시선이 비껴가고, 몇 cm 더 마른 여자에 시선을 빼앗기고, 몇 cm 더 작은 남자는 시선을 차지할 수 없어. 인간은 육체가 없으면 고통받을 일도 없어.”
<호문쿨루스>, 야마모토 히데오, 11권



오늘은 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사실 이제까지 제가 해 왔던 이야기 중 몸에 관한 것이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술도, 역사도, 문화도, 철학도 깊게 들여다보면 모두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몸으로 하는 것이고, 몸을 위한 것이고, 몸의 이야기이죠.


우리가 해 왔던 모든 것이 몸을 떠나서는 존재 자체도 불분명해지는 것들뿐입니다. 사회라는 것도 사람이라는 신체를 가진 존재들이 모여 사는 어떠한 것을 의미하며, 문화는 거기에서 발생한 어떤 것이죠. 물론,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계는 몸이 아니라 정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쪽이죠.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반대로 봅니다. 먼저 형이상학적인 것이 존재하고 물질적인 세상이 거기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종교가 있죠. 형이상학적 존재인 신이 형태를 가진, 즉 물질로 구성된 우리를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문화의 근원을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 예컨대 영혼이나 정신, 아니면 리(理)나, 신(神) 등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전자, 즉 제가 보는 세계관을 대표적인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유물론이 되고, 후자는 실재론이라든가 혹은 종교라든가 여러 가지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라는 점이죠. 


이 둘 중 무엇이 맞았다거나 혹은 무엇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제 각각의 시각을 가지고, 즉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갈 테고,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요즘에는 어떠한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도겠죠. 


이 정도 썼으면, 웬만큼 눈치가 빠르신 독자분들은 아마 다들 짐작할 수 있겠죠. 

지금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더욱 가까운 시대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을 해석하고, 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유물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앞으로도 이런 물질적인 세계관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겠죠. 최근 들어 발전하는 AI에 관한 것이라든가, VR에 관한 기술적 발전들이 우리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술도 마찬가지겠죠. 이에 관해서는 향후에 따로 지면을 활용하여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계관의 변화가 예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가입니다. 


앞선 연재에서도 설명을 했지만, 모든 예술가와 철학자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이나 예술을 하는 것이죠. 지금보다 삶이 더 힘겨워지길 바라며 그런 것들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살자면 가장 먼저 뭐가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흐름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마찬가지로,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별 탈 없이 잘 당도하려면, 우선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즉 이 세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떻게 가야 할지가 예상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철학자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먼저 세계를 해석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그는 학문을 예비학문, 이론철학, 실천철학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세계와 사람을 연구하였습니다. 먼저 어쨌든 세상을 파악해야 하긴 할 텐데, 무엇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겠죠. 그냥 대충 때려잡아서 “내가 살아보니 세상은 이렇더라”라는 식으로 했다면 수천 년 동안 이름을 남긴 철학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럴싸하게 설명해야 했고, 그러므로 그에 걸맞은 도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거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가 바로바로 이성이었고, 이것을 체계화한 것이 논리학입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재료, 즉 물감을 논리학으로 본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파악할 준비가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세상을 관찰해야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으로 세상을 판단하여, “세상은 이러저러하게 구성되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이론을 만든 것이죠. 세상에 대한 이론을 세우는 일, 이론철학을 한 것입니다. 


도구도 있고, 그것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판단했으니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저러하니 우리는 요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 즉 실천에 관한 철학이 바로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것을 개인적 영역으로 한정 짓게 되면 윤리학이 되는 것이고, 사회적 영역까지 확장하게 되면 정치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예비학문으로 학문의 바탕을 세우고 그것으로 세계에 관한 이론철학(세계관)을 확립한 후 거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실천철학을 자세하게 설명한 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입니다.  


이건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철학자, 예술가, 문학가들이 모두 마찬가지였죠.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잘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허구한 날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느니, 경제의 흐름을 봐야 한다느니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로 정신중심주의에서 물질중심주의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죠. 


역사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마치 땅에 그은 지적도마냥 “언제까지는 근대이고, 언제부터는 현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변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자마다, 전공마다 전부 다르게 해석하죠.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역사를 만드는 것은 물질이다)으로 볼 수도 있겠고, 니체 전공자라면 니체의 “은 죽었다”라는 언명을 그 시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경제학자는 산업혁명으로 볼 수도 있고, 사회학자나 문화인류학자는 서구 제국주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죠. 아마 무척 많은 해석의 관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 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시기가 언제든 현대인들의 세계관이 유물론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철학자도, 예술가도 그 세계 속에서 “물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아,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세계관”이 유물론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지 세계가 유물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물질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바뀌어 왔을 뿐이죠. 


물질적인 세계관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그 세계 속에 있는 “나”에 관한 시각도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영혼이나 정신이 중요했던 세계였다면, 이제는 점점 그 비중이 물질, 즉 육체로 쏠리고 있죠.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출간되는 책에 보충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술가들의 주제와 소재도 육체성을 향하는 것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예술작품뿐만이 아닙니다. 사회 문제도 마찬가지죠. 최근에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 “Me too”운동 역시 몸에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성애 관련 이슈나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성형수술 관련 이슈 등도 모두 육체성에 속한 것입니다. 과학발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VR(Virtual Reality)은 육체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고 확장하는가에 관한 고민 끝에 나온 것이며, 온갖 로봇 공학과 유전과학, 의료과학 등도 마찬가지죠. 


이제 세계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 형이하학적인 세계, 즉 감각과 물질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예술가들은 이런 현상을 예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조금 더 일찍 감지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하거나 고발하는 사람들이죠.


이 변화하는 세계관 속에서 예술가들 중 몇몇은 육체의 해방을 선언합니다. 


이전까지의 거의 모든 사고방식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명제 그대로라기보다는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여야 한다”라고 읽혀 왔습니다. 그래서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말도 있고,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라는 말도 있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 몸은 이제까지 정신, 더 넓게 말하면 문화, 사회적인 것들이 지배해 왔습니다. 육체적인 것은 천하고 가치가 낮은 것으로 치부되었고, 육체적인 욕망은 심지어 “죄”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몸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죠.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가 긍정적인 관념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종교에서는 더욱 그러하죠. 종교에서 여성의 몸은 항상 수동적인 존재로써, 성적 대상물이 되거나 죄악과 타락의 상징이 되어왔습니다. 이슬람권의 종교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기독교 모두 마찬가지였죠. 단 한 번도 여성의 몸은 주체적인 권리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했고, 다소곳해야 했고, 여성의 몸은 아름다워야 하거나, 생산을 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건 여자에게만 속하는 제약은 아닙니다. 남자 역시 그리 마찬가지죠. 남자는 늠름해야 했고, 용맹해야 했고, 남자의 몸은 그에 맞춰 어깨가 떡 벌어져야 하고, 힘이 세야 한다는 관념, 즉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죠.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지배해 왔습니다. 


몸은 우리에게 있어 윤리적종교적문화적으로 가장 강한 억압을 받는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이런 세계관이 조금 달라집니다. 몸을 그렇게 부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죠. 부정과 억압의 대상이었던 몸이 이제 점점 “나”의 주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렇게 새로워진 몸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모나 하툼의 작품은 그렇게 변한 시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Corps étranger>, Mona Hatoum (1994) 출처:http://blog.kiasma.fi
출처: www.theguardian.com


보통, 예술적 측면에서 “나”를 바라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자화상입니다. 반 고흐나 렘브란트, 뒤러처럼 독립된 자화상이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라파엘로나 벨라스케스처럼 작품의 일부로 참여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어떠한 방식이든 자신을 응시하는 시각은 표면적이라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나”를 상상했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 육체성보다도 표면적 이미지죠. 


그러나 모나 하툼의 작업은 “나”를 보기 위해 시선을 우리의 안, 즉 내면으로 돌려 생생한 육체의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아, 여기에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의 작품은 영혼이나 정신성이 사라진 시기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내면”은 그런 정신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그의 작품은 관람객이 원통형의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투사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객은 원통의 구조물 정 중앙 바닥에서 생체 기관 같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몸속을 내시경으로 촬영한 이미지입니다. 관람객들은 우물처럼 어두운 원통 안에서 작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내시경을 따라 작가의 몸을 훑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출처: www.slideplayer.com


<낯선 몸(Corps étranger)>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의 몸”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육체성은 우리가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진리처럼 여겨져 왔던 정신과 영혼이라는 기준이 육체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내 몸을 떠나서 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재의 서두에 인용하였던 만화 <호문쿨루스>의 대사처럼, 우리는 인간이란 형태, 즉 몸을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만지고, 맛보고,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때서야 비로소 ‘인간(人間)’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담론은 곧이어 몸의 통제에 관한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당연한 수순이죠. 나의 몸이 내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라면, 내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나는 스스로 내 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예술가들은 몸에 관한 쟁점을 뒤집어엎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몸은 사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내 몸은 내 것”이라는 게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예전에 제가 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체육 시간에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었습니다. 좋은 말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몸을 국가의 소유물로 귀속시킨다는 말이죠. 내 체력은 내 체력이지 국가의 체력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런닝머신을 뛰면서 국력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변화 중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나타나는 분야는 여성의 신체에 관한 것입니다. 여성의 신체는 이제까지 자유로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사회적 담론 속에서 제약을 받아 왔죠. 무척 흔한 예로는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든지, 짧은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든지, 혹은 브레지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이죠. 언제나 여성의 몸은 억압 받아 왔습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 바바라 크루거, 출처: www.thebroad.org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코드화 되어 있는 이런 몸에 대한 시선을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육체를 부정하는 데서는 벗어났지만, 언제부턴가 지속적으로 대상화 되어 가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각축장이 되어 버린 여성의 몸,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몸을 고발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죠. 


그래서 그는 

“Your body is a battleground"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터에서 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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