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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Mar 23. 2018

진짜와 진짜: 임마누엘 칸트와 쿠르베

진짜와 진짜: 임마누엘 칸트와 쿠르베


여기 한 커플이 있습니다. 


출처: pixabay.com


여느 커플처럼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 되었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커플이죠. 하지만 역시 여느 커플처럼 이 커플에도 운명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권태기입니다. 

늙음처럼, 어쩔 수 없이 이 커플에도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굳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뭐,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이게 당연한 수순입니다. "마녀를 물리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죠. 마녀가 없는 세상에서, 왕자와 공주도 분명 권태기에 빠졌을 겁니다. 문제는 이 권태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겠죠. 


출처: pixabay.com


아무튼 이 커플은 그다지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했나봅니다. 힘겨워서, 짜증나서, 힘들어서, 외로워서, 실망해서... 지친 여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너는 왜 내 진짜 모습을 사랑하지 않아?"

사실은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여자로서도 알 수 없지만, 반대로, 그래서 이유는 차고 넘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그리고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남자의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남자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또 시작이군. 아 지겨워'


권태기란, 양쪽에 같이 오는 것이 보통이죠. 남자라고 오매불망, 일편단심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매진할 리가 없습니다. 남자 역시 여자처럼, 힘겹고, 짜증나고, 힘들고, 외롭고, 실망스럽죠. 사실 그도 이 관계를 어째서 계속 진행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먼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어쩐지 이 관계의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남자는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지만 여자는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부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말합니다. 


"사랑한다면서 그래? 넌 그저 내 겉모습을 사랑하는 것뿐이잖아. 내 진짜 모습은 관심도 없고, 그저 니가 보고 싶은대로만 보잖아!"

"아니야! 난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진짜 네 모습을 사랑한다고!"


남자는 억울합니다. 자신은 여자를 있는 그대로, 여자의 진짜 모습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니, 그보다 어떻게 진짜가 아닌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애당초 그게 가능한지도 모를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인의 마지막이야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것이 이 글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죠. 이번 연재에서 중요한 부분은 권태기가 아니라 여자와 남자의 대화, 그중에서도 “진짜”라는 부분이죠. 


진짜란 모호합니다. 

진짜가 도대체 뭘까요? 앞서의 남자와 여자에게서 진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여자가 말하는 진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남자가 생각하는 진짜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술에서도 비슷합니다. 역사 이래로 진짜를 그리지 않았던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래의 그림처럼 17,000년 전에 동굴 벽에 그려졌던 벽화도 당시 살았던 선사인들에게는 "진짜"였습니다. 

출처: www.donsmaps.com


우리가 보기에는 외계인을 그려 놓은 건지 뭔지 모를 정도로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킴벌리 고원의 선사인들에게는 진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저렇게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죠. 중세 시대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게 진짜입니다. 이건 앞서의 세잔이야기를 할 때 설명했던 바와 같죠. 르네상스 시대에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의 예를 들었던 커플에게 당면했던 문제가 여기에서도 드러납니다. 각자의 진짜가 다르다는 것이죠. 우리 눈에 선사시대나 중세의 작품이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진짜가 우리의 진짜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진짜는 한 가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니 그럴 것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가 인류 보편적으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진짜로 진짜"라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건 그저 "그들만의 진짜"일뿐이죠.   


이렇게 진짜에 관한 관점의 문제는 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특정한 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진짜가 진짜로 있다고 생각했었죠. 뭔가 말이 이상해졌지만, 쉽게 말해 진짜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가짜보다야 진짜가 여러모로 나으니 당연히 진짜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찾는 여행이라든가, 나를 찾는 글쓰기라든가, 나를 찾는 명상이라든가 아무튼 그 비슷한 종류의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진짜 나"를 찾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나를 찾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진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죠. 아니, 그 전에, "진짜"라는 게 있긴 있는 건지, 그리고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애매합니다. 우리는 어째서 그 무엇,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있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무엇을 진짜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요?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사는데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일 수도 있는 그런 질문들, 예컨대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진짜가 뭐긴 뭐야, 그냥 눈에 보이는 게 진짜지!"라며 무시해 버릴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그렇죠. 삶이 뭐긴 뭐겠습니까? 삶이 삶이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을 낭비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런 게 만약 있다면) 진짜가 뭔지 알아야 가짜를 위해 인생을 낭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를 사기 위해 벌지 않아도 될 돈을 버느라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아도 되고, 혹은 반대로 그것을 못 샀다는 자괴감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런 고리타분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철학이란학문 중에서 가장 유용한 학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질문에 천착했던 철학자 중 꽤 신선한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칸트라는 사람이죠. 개인적으로는 절대 친구로 삶고 싶지 않은 인물 1, 2위를 다툴만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의 철학을 처음 읽었을 때의 경험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었겠죠. 그러니까 그토록 위대한 철학자로 추앙을 받는 것이겠고요.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죠. 세상을 보는 눈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꿔버린 코페르니쿠스처럼 혁명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죠.


뭔가 무척 잘난 척이 심하고 재수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의 방식은 그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완전히 구분해 놓습니다. 이 사람의 책이야 어렵기도 하고 내용도 방대하기로 악명 높다 보니,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어떤 예술가나 철학자도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니 칸트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관을 먼저 봐야겠습니다.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나서 1804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살았던 시대는, 과학적으로 보자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지배하던 시기였죠. 

예술 하기도 벅찬데 철학까지 하라더니, 이제는 과학 얘기 까지 한다고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냥 아주아주아주 기본적인 상식일 뿐이니 전혀!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유인력의 법칙과 상대성이론은 그 이름에서부터 차이가 명확합니다. 만유인력이란, 이름 그대로 세상 모든 물질에는 인력, 즉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이 있다는 말이죠. 반대로 상대성이론은 그게 아니라 중력이 모든 존재에게 다르게 적용 된다는 것이고요. 뉴턴도 어려운데 아인슈타인이야기까지 나오니 짜증이 나죠? 걱정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인슈타인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아무튼, 뉴턴의 말대로 중력이 A라는 곳에서는 a라는 식으로, B라는 곳에서는 b라는 식으로 적용 되면 안 되겠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돼야 그걸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법칙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중력이니 힘이니 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죠. 그리고 “작용”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에 따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작용이라는 단어는 명사이지만 작용하지 않으면, 즉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작용이 아니죠. 멈춘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뉴턴의 모든 법칙에는 시간과 공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애당초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며, 그건 이미 과학의 영역이 아니죠. 


그런데 이런 시간과 공간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여기저기(여기저기라는 말도 이미 공간이죠) 다르거나, 혹은 하나가 아니라면 뉴턴의 법칙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초에 모든 곳에 균등한 공간,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시간도 하나뿐이며, 공간도 하나뿐이라는 소리죠. 


쉽게 말해 세상 자체가 하나뿐이라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어렵고 길게 말했군요. 이렇게 상식적인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제부터 말하려는 칸트의 철학에서 이게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는 말은, 지금 내가 여기 있을 때에는 그 어떤 누구도 저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하죠.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지금 여기 동시에 다른 사람이 지금 여기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함이 사실은 너무 당연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칸트 이전의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도록 하죠.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는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스마트폰이 있을 겁니다. 혹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일 수도 있죠. 어느 쪽이든,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 즉 눈의 각막을 통해 들어오는 이미지는 여러분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옆에서 슬쩍 훔쳐봐서 비슷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 누구도 여러분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여러분이 지금 앉아있는 의자에는 여러분 외에 누구도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죠.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똑같은 걸 볼 수 있잖아요."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었던 것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문화권이나 말에는 항상 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앉아 있는"이 아니라 "앉아 있었던"이죠. 그러니까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 그가 앉았다."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말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이미 전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똑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같은 대상을 보고 있더라도 모두 다르게 보는 것이죠. 같은 시간에 보고 있다면, 공간 때문에 각도가 다르다거나, 같은 위치에서 같은 각도로 보고 있다면 시간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태를 모든 사람이 모두 다르게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런 질문이 당연히 따라 나옵니다. 철학이란 언제나 그렇듯 질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니까요. 


"그럼 도대체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 걸까?"

라고 말입니다. 


정답은, 그저 "모른다"입니다.

우리는 그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알 수 없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것이 나에게는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정도뿐입니다. 


이런 사고의 흐름은 의외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 저것의 진짜 모습은 뭐지?”라는 결론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내게는 이렇게 보이지만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면 이것의 진짜 모습은 뭘까?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럼 이것의 진짜 모습을 알 수는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보이니까 그 중 어떤 사람(아마도 "나"이겠지만요)이 보는 게 진짜 모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겠죠. 그래서 칸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

고 말입니다.


그것의 진짜 모습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름다움에 대입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걸까요? 아름다움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미술이 되고, 그것을 글로 쓰면 문학이 되고, 몸짓으로 옮겨 놓으면 춤이 되는 걸까요? 


물론, 정답은 아직 모릅니다. 이건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죠. 어떤 사람들은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조화와 균형이 잘 맞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조화니 균형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학습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무엇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의 진영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와 사상가, 예술가들이 여전히 그것을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축적하여 쌓아온 데이터와 이론을 바탕으로 제각각 주장하고 있죠. 


그 중 한 예술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고 있다고 말이죠. 바로 쿠르베입니다. 


구스타프 쿠르베의 자화상


그는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화가들은 아름다움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쿠르베가 보기에 그건 애당초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이라는 고유함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의 그림은 사람들이 정해준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습니다. 천사니, 신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들을 전혀 그리지 않았죠. 그에게 있어 그건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오히려 자연, 그리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시민들, 서민들, 그리고 그들의 삶이었죠.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을 그립니다.  쿠르베에게 있어 세상의 주인공은,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부르주아, 혹은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 아니고, 세상을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짜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쿠르베는 생각했던 것이죠.  




마치 거리로 뛰쳐 나왔던 그 시절의 학생들, 

촛불을 들어 세상을 바꾸었던 그 순간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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