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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Apr 27. 2018

차이의 차이: 앤디 워홀과 질 들뢰즈

차이의 차이: 앤디 워홀과 질 들뢰즈     


Andy Warhol Campbell's Soup Cans(1962)


출근해서 업무를 보는 것보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어렵고, 난해한 시험 문제를 푸는 것보다 공부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어렵고, 수십 킬로그램짜리 벤치프레스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헬스장까지 가는 것이 어렵듯이, 언제나 시작이 어렵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글을 쓰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첫 문장이죠.     


그래서 오늘 글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인용입니다.     


사실, 저는 타인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요.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권위에 기대어 내 생각을 펴가는 것 같기도 해서죠. 남의 생각을 빌어 자신의 입을 여는 이런 방식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오늘은 조금 설렁설렁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게 오늘 주제와도 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들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철학자란, 언제나 그렇듯이 일상적인 것을 너무 어렵게 말한다는 게 흠이라면 흠입니다. 

물론, 그런 난해함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전공자가 읽기에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친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죠. 이건 철학이 시기적으로는 현대, 지역적으로는 프랑스로 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글이 어려울 수밖에요. 더구나 들뢰즈는 그런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조금 쉬운 말로 번역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번역했지만, 이쯤 되면 한국어든 프랑스어든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라는 말을 조금 쉬운 말(우리가 쓰는 방식의 말)로 번역해 본다면, 아마 “현대는 더 이상 같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번역되는지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문장의 핵심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재현에 대한 이해가 먼저 수반되어야 하므로, 먼저 그것에 대해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재현(re-presentation)이란, 어딘가 있는 것(presence, 존재하는 것)다시(re-) 있게(presence)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있던 것을 다시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같은 방식이나 같은 모습으로 있게 해야 합니다. 예컨대 아래 윌렘 칼프(Willem Kalf)의 정물화는 원래 있던(presence) 가재나 소뿔로 만든 술잔 등을 그림에 다시 있게(re-presentation)한 것이죠.      


Still life with drinking horn(Willem Kalf, 1653)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재현을 하기 위해서는 닮아야 합니다. 

가재는 원래의 가재와 닮아야 하고, 소뿔 술잔은 원래의 소뿔 술잔과 닮아야 하죠. 그래야 이게 무엇을 다시 가지고 온 것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재현의 역할이고 효과이고, 재현 그 자체이죠. 요컨대 재현이란 곧 “닮음”을 기준으로 진행되어왔고, 그것의 파산이 현대적 생각이므로,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라는 말은, “현대에는 더 이상 닮음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다음 문장인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즉 닮음에 구속되는 것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들의 발견과 더불어" 현대가 가능해집니다.     


닮음의 끝남과 함께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들뢰즈는 말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습이 갑자기 바뀌진 않습니다. 시대란, 언제나 그렇듯, 땅에 그어 놓은 줄처럼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세상은 아마 어제나 오늘이나 비슷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슷해 보이는” 세상 이면에는 “꿈틀거리는 어떤 힘”, 어떤 새로운 힘이 싹트고 있었는데, 이 새로움의 발견과 함께 현대는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이 새로움이 뭘까요?      

“닮음”이 아닌 것, “동일성”이 아닌 것, “동일자”가 아닌 것, 

바로 “다름”, 혹은 “차이”입니다.

 

들뢰즈에 따르자면, “차이”가 현대를 있게 하였고, 그러므로 현대는 “차이”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한 “우리는 우리의 안팎에서 지극히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반복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반복들로부터 끊임없이 어떤 차이, 이형(異形), 변양(變樣)들을 추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현대적 삶의 특징이다.”라고 말합니다.

      

역시 번역을 해보죠. 

우리는 세상을 볼 때 항상 반복(닮은 것이 다시 오는 것, 즉 재현)을 봅니다. 사계절의 반복, 역사의 반복, 삶의 반복, 모든 것은 반복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즉 우리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 전혀 다른 것들의 오고 감입니다.  사계절은 반복되지 않으며, 나날은 언제나 새롭고, 역사에도 항상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다른 일들이 발생하죠.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올해도 봄이 왔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2017년에도, 2016년도에도 왔던 봄이 또다시 왔다는 의미죠. 봄이 반복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은 완전히 다른 봄입니다. 올해의 진달래는 작년의 진달래와 다르고, 올해의 새싹은 작년의 새싹과 다른 새싹입니다. 우리는 올해 핀 벚꽃을 보며 작년에 피었던 벚꽃과 같은 벚꽃이 다시 피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완전히 다른 벚꽃이듯,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작년의 벚꽃은 날이 지나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갔을 테고, 올해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벚꽃이 피었죠.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 그리고 또 그 후년,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은 다른 것이며, 그러므로 "온다"라는 말도 사실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죠. 

언제나 모든 것은 "다름"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같음"으로 보아왔을 뿐이죠.     


그리고 이 “다름”을, 

존재의 “차이”를, 

현대는 찾아내기 시작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어렵게 말했지만, 비슷한 사례를 우리의 일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패션에서 말이죠. 

 

너무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였습니다. 극 중에서 레옹이 쓰던 선글라스가 왜 그렇게 멋있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그것과 전혀 다른, 하지만 얼추 비슷한(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말 이상했을 법한)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습니다. 심지어 안경을 맞춰 주시는 사장님도, 이런 안경은 팔지도 않지만 어쨌든 만들어주기는 만들어주는데 쓰고 다닐 수 있겠냐며, 걱정해 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결과는... 뭐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참했죠. 

그걸 쓰고 학교에 간 첫날부터 저는 모든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황당했던지 혼내기는커녕 같이 놀리셨었죠.  체벌이라면 체벌인데, 하루 종일 그 안경을 벗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옆반, 그리고 그 옆반까지 소문이 나서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었죠. 

충격이었습니다. 

이 앞선 패션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게 그 당시의 인식이었습니다. 대략 20년쯤 된 것 같은데,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는 남다른(?) 패션센스를 가졌거나 독특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옷을 고를 때도 가능하면 무난한 것, 즉 “닮은” 것을 골랐죠.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포인트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엘리베이터나 횡단보도에서, 혹은 교실이나 사무실에서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죠.  

    

예전에는 내가 남들과 다르게 입지는 않았을까, 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면, 이제는 남이 나와 같은 옷을 입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전이 닮음의 세계였다면, 이제는 다름의 세계인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건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소리입니다. 

나는 다르기 때문에 나일 수 있는 것이죠. 문성준은 원빈과 (인간이라는 점에서) 많이 닮긴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키, 몸매... 등등 아주 사소하고 작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문성준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원빈과 완전히 똑같다면(좋겠지만), 저는 더 이상 문성준일 수 없겠죠.

       

나는 네가 아니므로 나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앤디 워홀의 작품입니다. 

그의 캠벨 수프는 같은 통조림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들의 집합입니다. 어떤 것은 크림수프이고, 어떤 것은 치킨 수프이고, 또 어떤 것은 토마토 수프이죠. 같은 수프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들로부터 끊임없이 추출되는 어떤 차이, 이형(異形), 변양(變樣)이죠. 그리고 그게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Campbell's Soup Cans (Andy Warhol, 1962)

     

우리는 어째서 이 단순한 사실을 잊고 살았을까요?      

항상 누구와 비교하며 그와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지치고, 결국엔 자책하며 살았을까요?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하고, 그런 소속감에서 안정을 느낄 수밖에 없죠. 인간이라는 종(species) 자체가 그렇게 진화되어 왔으니까요. 힘이 약한 인간은 홀로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뭉쳐야 했죠. 떨어짐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왕따에 그렇게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모순적인 동물이어서 소속감에서 안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집단의 한 조각으로 함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말합니다. 


“삶의 과제는 차이가 분배되는 공간에 모든 반복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라고요. 


언제나 닮음은 차이를 전제하는 것처럼, 차이가 있어야 닮음이 있고, 닮음이 있어야 차이가 있는 것처럼, 닮음과 차이는 원래 한쌍입니다. 어떤 것을 아무리 얇게 잘라도 양면이 존재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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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이라 쓰고 사족이라 읽는)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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