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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May 18. 2018

언어 깨기: 솔 르윗과 르네 마그리트

언어 깨기: 개념미술과 솔 르윗     


언어와 예술     


<이미지의 반역>,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와 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 작품


이 연재에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걸 언제 다 쓰나 싶었던 것도 어느새 벌써 18회째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두 차례의 연재만이 남았네요. 분량으로만 보자면 이제까지 쓴 글이 (이미지를 제외하고) 대략 A4용지로 70장이 됩니다. 보통, A4용지 기준 60~70 매이면 단행본 한 권이 나오니, 이 정도면 분량만으로는 단행본 한 권 정도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재라는 매주 연재라는 특성상 주마다 한 챕터를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게 써야 했기 때문에 실제 출판용 원고의 70% 정도밖에 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출판용으로는 아마 A4 기준 약 100~110매 정도가 될 것 같네요. 그럼, 편집하고 이미지가 추가되고 어쩌고 저쩌고 하여 단행본으로 나오게 되면, 분량이 꽤 될 것 같습니다.


걱정인 것은, 식당에서는 주문한 음식이 예상보다 많이 나오게 되면 대부분은 좋아하지만, 책은 그 반대라는 점입니다. 내용이 많고, 책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독자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죠. 그래서 분량 조절도 책을 쓰는데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무튼, 연재의 막바지에 이르다 보니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우리가 처음 제시했던 문제에 관해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여정의 끝에는 항상 처음이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처음은, 처음의 처음이 아니죠. 지난 연재에 언급하였던 것처럼, 봄이 왔지만 그 봄이 작년에 왔던 그 봄은 아닙니다.      


연재의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무엇보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말과 이미지의 관계입니다. 말은 무엇인지, 이미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말이 먼저일까? 이미지가 먼저일까? 하는 부분이었죠.


이제까지의 연재를 꾸준히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무엇이 먼저라고 단정 짓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에 관해 사람들에게 작품으로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 있죠. 


바로 솔 르윗이라는 작가입니다. 


모든 작가, 그리고 그들의 예술 작품들을 하나의 사조로 묶어 설명하게 되면, 그들의 풍부함을 놓쳐버리게 되듯, 솔 르윗도 하나의 사조로 한정 지어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때는 미니멀리즘 작품을 하다가도, 언제는 개념미술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팝아트 스타일의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솔 르윗은 무슨무슨 사조이다”라고 단정 지어 소개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별다른 고민 없이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개념미술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가능하면 그런 규정을 벗어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솔 르윗의 작품 중에서도 오늘 보여드릴 작품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Red Square White Letters, 1962


이 작품은 현대미술이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얼핏 보기에는 이게 뭔가 싶은 작품입니다. 별다른 이미지가 없죠. 그저 낱말풀이 퍼즐 같은 정사각형 아홉 개와 글자 몇 개뿐입니다. 색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요. 그런데 솔 르윗은 이 작품을 통해 말과 이미지의 관계, 혹은 그 우선순위를 우리에게 증명해 보입니다. 

  
 서구권의,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모국어가 아닌 제2 외국어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문명권에 속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붉은색이 강렬하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반드시 “Red square"와 “White Retters"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죠. Red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알파벳만 안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글자를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솔 르윗이 Red Square White Letters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미지와 글자 중 무엇이 더 강력하냐는 것이죠. 그리고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글자, 즉 텍스트, 개념이 더 강렬하다는 것이죠.      


라캉이라는 정신분석가는 이런 텍스트의 어쩔 수 없음을 일컬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

라고요.      


선물로 받아들인 목마 속 병사들의 침입을 걷잡을 수 없었던 트로이처럼, 우리 역시 언어를 알아버리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언어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솔 르윗의 그림처럼 말이죠. 이 빨갛고 하얀 무언가를 Red나 White의 어떤 이미지로는 볼 수 없고, 그것을 글자로 밖에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언어, Red라는 단어를 알아버리면, 이제 더 이상 이런 것들,    

  

    

이런 무엇(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에 표시되는 일련의 이미지)들 역시 “Red”라는 언어 외에는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어져 버리죠.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모든 과정이 언어화되어 버리는 겁니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주변을 둘러보고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은 것을 찾아보세요. 아마 찾기 힘들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보통 우리에게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감정들만 봐도 알 수가 있죠. 우리의 기분과 감정 중에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은 감정은 포착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감정이 생겼을 때 어떻게든 그것은 이미 이름 지어진 감정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죠. 이게 일반적인 말과 세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자유를 얻기도 했지만, 그 자유에 더 강력한 구속을 당해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라고 말하지만, 라캉식으로 보자면 그 자유야말로 더 큰 구속이죠. 그래서 반대로 동양권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든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쉽게 얘기하자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보통 그런 것들은 진리라든가, 정수라든가, 아니면 신이나 뭐 그 비슷한 초월적 차원, 그리고 더 중요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진리, “불립문자”,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는 진리조차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은 언어를 피안에 이르는 배라고 말씀하셨죠.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언어가 없으면 피안, 즉 진리의 세계(그런 게 있다면 말이죠)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고, 둘째는 강을 건넜으면 그 배를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이제 배에서 내리라는 뜻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배를 짊어지고 가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에 너무 얽매이죠.      


진짜라는 말에 얽매이고, 가짜라는 말에 얽매이고, 사랑한다는 말에 얽매이고, 미워한다는 말에 얽매입니다.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말들이 필요 없다는 소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처럼 강 건너에 도착했으면 배에서 내려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죠.     

 

그 말이 마치 철석 같은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에 매달립니다. 

강을 건너와 이제 육지인데도, 배에서 내리면 물에 빠져 죽기라도 할 것처럼, 배에서 내릴 생각을 안 하니 문제인 것이죠. 


말은 그저 말일 뿐입니다.


즉 세상을 설명하는 도구이고, 

우연히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죠.


지금 내가 너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고, “파랑”이라 불러도 좋고, “사자”라 불러도 좋습니다. 뭐라고 부른 들 그것은 변하지 않죠. 아, 물론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죠. 이렇게 말이 실제를 지배한다고 보기 시작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관점은 책에서 더 다루도록 하죠.      


아무튼 지금의 연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과 사물의 관계가 필연적이지도, 불변하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그런 관점을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여기 몇 개 있습니다. 

바로 마그리트의 작품들이죠.      


<Key of Dreams>, Rene Magritte


그림을 보면 그림과 글자가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 그림에는 “The door”라고 쓰여있고, 시계에는 “The wind”, 물병에는 “The bird”라고 쓰여 있죠. 반면 가방에는 그대로 “The valise”라고 제대로 쓰여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여기에서 무슨 패턴을 발견하라는 아이큐 퀴즈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그리트가 영어를 몰라서 이렇게 쓴 것도 아니죠. 초현실주의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건 제목 그대로 무의식, 즉 꿈을 해석하는 열쇠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과 사물의 관계를 비트는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말이 꼭 정해져 있는 것,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꼭 주어진 대로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을 “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시계를 “바람”이라고 할 수도 있죠. 나에게 그게 더 도움이 된다면 말이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익숙한 관계를 깨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Familiar objects, Rene Magritte

    

그러고 나서는 개인적 가치를 중심으로 자신의 방을 재배치하죠. 방이란 곧, 우리 삶의 가장 은밀한 영역이고, 그러한 공간의 재배치는 곧, 가장 내밀한 곳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마그리트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그립니다. 

매일 같이 아틀리에에 나가기 위해 단정하게 머리를 빗는 머리빗, 수염을 깎는 솔, 비누, 유리잔, 성냥 등, 일상적이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잇는 것들을 가장 크게 그리죠. 

다른 누구의 기준도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Les valeurs personnelles(Personal Values>, Rene Magri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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