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에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을 읽고 쓴 글
사랑하는 사람과 이만 헤어지기로 한 지 꼬박 일 년이 넘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도 여전히 나를 아끼지만 우리는 더이상 연인은 아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놀랍게도 헤어지고 나서부터 새로이 깨닫고 있다. 그와의 시간을 곱씹을 적마다 말이다.
아직 깨달을 게 많다. 함께했던 시간이 짧지 않았기 때문. 아, 말해두는데 이건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미련 같은 건 아니다.
그는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내게 이런 일기를 보내왔었다.
누군가랑 둘이서 같이 책을 읽어본 게 아마 처음이지 싶다. 누군가랑 같은 책을 같은 곳에서 동시에 읽어본 것도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보다 그 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더 많이 생각해 본 사람이어서, 책을 읽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르면 바로바로 미주알고주알 떠들 수 있는데, 이게 엄청나게 행복한 일이라는 걸 예전에는 머리로만 알았다. 경험해 보니 정말 그렇다. 소설의 힘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사는 나누기 좋다, 좋은 대화의 소재가 된다. 살면서 아주 많은 좋은 것들을 ‘기다려’ 왔을 텐데, 오늘 같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이것도 내가 나도 모르게 열심히 기다려온 것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됐다.
예상했겠지만, 우리가 그때 함께 읽었던 게 김연수였다.
그의 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을 때는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든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재밌다든가 하기보다, 그냥 '김연수를 읽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의 유려한 문장들을 맛보고 싶다면 소설, 그의 의외의 강단을 엿보고 싶다면 에세이를 보라, 굳이 따지자면 에세이가 더 훌륭한 작가다' 같은 뻔한 평을 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그를 읽었다고 하는 게 더 근사하다. 이유는 그의 작품과 인터뷰를 여럿 읽어보고 북토크에 찾아가 본 이들이 알아줄 터다. 모든 작품이 그를 닮았다. 그가 일생에 걸쳐 하고 싶은 이야기, 그러니까 인간의 연한 면 -그래서 때로 악해보일 수도 있는 굴곡진 삶의 모습들- 에 대해 상상하고 이해하고 보듬는 노력이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로 변용돼 있다.
20대를 함께 보낸 김연수의 문장들을, 열렬히 아끼고 존경했던 그와 나누는 일은 사실 고된 작업이었다. 나에겐 저절로 읽히는 그 문장들을 그에겐 애써 납득시켜야만 했으니까. 나는 김연수의 대변인이 된 듯 문장과 그 너머 생각들을 설명해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내 마음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그가 보냈던 저 일기 때문일 거다. '너와 내가 했던 행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자기 언어로 소개해주는 노력, 그게 그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문장들>에는 서른다섯의 김연수를 한껏 흔들었던 문장들이 담겨 있다. 스물다섯의 나를 한껏 흔들었던 게 김연수의 문장들이라면, 30대가 된 후 나를 얼르고 쓰다듬고 연마시킨 건 그가 내게 보내오곤 했던 일기 속 문장들이었다. 이것 봐, 좋아하는 책을 선정한 모임에 놀러가기 독후감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또 깨닫잖아. 그는 나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