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원에서 사과를 그리다가
최근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선 긋기, 도형 그리기, 명암 넣기 등 그림 그리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걸 배운다. 기초를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다음은 눈앞에 있는 사물을 그리는 훈련을 한다. 사과, 찻잔, 주전자와 같은 선이 간단하고 쉬운 사물에서 시작해 조금 더 정교한 사물을, 더 나아가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 석고상을 그리는 것으로 진도가 나간다.
혹시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미술적 재능을 이번 기회에 찾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아주 조금 가져봤지만, 대단한 착각이었다. 매 수업에서 느껴지는 이 무력감이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이 간단한 사물, 기껏해야 찻잔 하나를 그리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울 줄 정말 몰랐다! 물체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것인지… 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그림 그리는 손과 실제로 움직이는 손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그나마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내가 찾은 방법은 틀을 잘 잡아두고 시작하는 것이다. 대략적인 크기와 비율, 각도 같은 요소를 최대한 정확하게 잡고 시작하면 그림이 산으로 가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틀’을 잡기 위해서는 관찰을 잘하는 것이 필요한 데, 평소보다 한 20배의 관찰력을 가지고 내가 그리는 대상을 자세히 요리조리 살펴봐야 한다. 위에서도 봐보고 아래에서, 옆에서도 봐본다. 또 어떤 지점에서 얼마만큼의 빛을 받고 있는지, 그림자는 어디로 생기는지, 지면과 맞닿아 있는 각도는 어떤지 등등. 평소에 관심 없이 지나치던 부분들을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물을 따라 그리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보이지 않는 생각을 정리해 한정된 어휘로 표현하는 글쓰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생각이 어렴풋하고 명확하지 않을 때도 물론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니까) 어렵지만, 가끔은 명확하다고 확신하고 타이핑을 했지만 그 글을 읽어보면 ‘지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림을 그리다 ‘어? 이게 저 사과를 그린 거라고?’ 하듯이.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크게 분류해 보면 아래와 같다.
i) 충분히 깊게 사유하지 않고 성급하게 쓴 글
ii) 처음에 가진 생각은 분명 이게 아니었는 데, 쓰면서 앞/뒤 맥락, 기승전결 등 글의 완결성을 고려하다 보니 오히려 게으른 Kitsch의 내용만이 가득해진 글
iii) 독자의 관점이 아닌 내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의식의 흐름대로 쓴 정돈되지 않은 글
깊게 사유하고 내가 쓰고 싶은 바를 끝까지 잘 끌고 나가는 힘, 그리고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될 수 있도록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