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모임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을 때, 손쉽게 분위기를 띄우려는 목적으로 “애인 있어요?”란 질문을 흔히 받았다. 그리고 연애기간이 4년 정도가 넘었을 무렵부터 받게 된 새로운 질문으로 “와, 한 번도 안 헤어졌어요?”가 추가됐다. 처음엔 왜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나 싶어서 불쾌하기도 했지만 이젠 긴 기간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뿐이겠거니 하고 넘기게 됐다. 나는 해와의 연애가 첫 연애라 긴 기간 연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애’를 제외하곤 다른 종류의 연애에 사실 무지하다. 나는 우리의 관계에 숙련되고 익숙해졌을 뿐이라 만약 해를 오려내고 다른 사람을 붙여놓는다면 난 쩔쩔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기 연애 경험자로서 주변인이 자연스럽게 연애상담을 해오곤 하는데 그때도 역시나 고민보다도 “헤어진적 없이 쭉 사귀었어?”가 먼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별의 경험이 없다. 나는 연애가 아닌 우정에 있어서도 좋거나, 싫거나가 분명한 편이라 연애관계란 사랑하거나, 헤어지거나 둘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연애초부터 해와 “우리가 사랑하지 않게 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헤어지도록 하자.” 약속했기에 관계를 더더욱 담백하게 생각했던 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연인들이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는 게 비일비재 하단 걸 알았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생각할 시간을 갖자.’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담백한 사랑을 하고 있다지만 한 때 사랑했던 연인이 울면서 매달린다면 나도 짜디 짠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곤 장담 못할 것 같다.
크게 싸우기도 했고, 그 싸움의 이유가 반복될 때 뭔가 허탈한 마음으로 이별이 머릿속을 스쳐간 적은 솔직히 꽤 많았다. 꿀밤 한 대 세게 쥐어박고 싶었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짜증의 순간보다 연속된 뜨뜻한 사랑의 날이 더 많이 쌓여서 진지하게 이별을 고민해본 적은 없다. 그런 우리 사이에서도 “헤어지자”란 말이 나온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사귄 지 채 반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정확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였다.
말을 꺼낸 건 해였는데 이별의 전적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그 제안이 3초도 안되어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해는 창피하다며 떠올리기 싫어하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해는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사실 나로선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게 이유가 ‘질투’였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잘못했다 생각하지 않았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서로 좋아하는데 굳이 이별을 하나?’ 란게 나의 기각 이유였다. 친구 사이에서도 생기는 감정이 질투인데 연인 사이에서 질투를 한들 뭐 그리 이상한 일일까 싶었다. 이해와 타협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안일한 생각이란 걸 알지만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소위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 많다. 학창 시절 여성 무리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고부터 여성들과 어울리는 게 어려웠다. 이건 성차별주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내 몸이 기억하는 본능 때문이다. 그냥 몸이 과거의 기억을 시도 때도 없이 기억하고 거부감과 방어기제를 내뿜을 뿐이다. 머리론 당연히 모든 여성들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아직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걸 보면 멀은 것 같다. 더군다나 태어나자마자 남자 형제가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공학을 다녔기에 다른 성별의 존재가 낯설지도 않았다. 편하기에 사교가 잘 이어졌고 운이 좋게도 상대 남성들도 뜻이 같아 우정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뿐이다. 많이들 애인을 사귀면 남(여) 사친과 거리를 둔다던데 나 같은 경우엔 애인이 있을 때 더 다른 성별의 친구들과 깊어질 수 있었다. 왜냐면 이성과 친구를 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들은 친구의 기준에 ‘서로 오해가 없을 관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성친구들도 내게 애인이 있음을 더 편하게 여겼다. 물론 친구 사이에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존재하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했다.
반면에 해는 여사친이 없다. 대학을 다닐 땐 몇몇 있었지만 ‘잘’ 지냈을 뿐 친구로 관계가 깊어진 경우는 없었다. 어찌 보면 나와 정반대의 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이게 처음으로 이별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이유였다. 일반적으론 내 관계를 방탕하다 여기겠지만 나는 당당했다. 내 인간관계의 앞 뒤를 설명하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와 사귈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그렇다한들 질투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는 아니기에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 역시 내 인간관계를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해는 내 인간관계를 충분히 이해했고 연애로 인한 인간관계의 변화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그가 이별의 말을 꺼낸 건 단지 ‘질투를 하는 본인의 모습’이 낯설고 싫었기 때문이었다.
연애초에 해는 내가 이성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걸 질투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해는 질투가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고, 이상했고, 낯설었다. 자신이 지금껏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나와 연애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고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말했다.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개소리하지 마.”
놀랍게도 실화다. 난 이 이야기가 욕먹을 거란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질투 때문에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니? “남사친이 많은 네가 싫어.”였다면 “어쩔 수 없지.” 하고 바로 오케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질투란 감정이 느껴지는 게 감당이 안된다? 이건 이상했다. (좀 과격한 말부터 나가긴 했지만) 술을 마시고 울며 말하는 그를 일단 앉히고 차디찬 대리석 계단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들과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서로 간에 (절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전제 하에) 열린 마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이해와 타협을 종용한다면 질투란 감정은 결코 적이 아니다. 그리고 협상을 통해 내린 결론이 일반적인 커플의 모습과 달라도 그건 틀린 게 아니다. 그냥 그런 관계도 있는 거다. 난 이 마음가짐이 우릴 이때까지 이별 없이 이어지게 만들었다 믿는다.
이제 해는 안다. 내가 다른 남자에게 빠진 귀걸이를 내 귓구멍에 끼우는데 도와달라 말해도 그게 오로지 ‘귀걸이를 끼우는데 도와줘.’ 일 뿐이란 걸. 남사친이 그 과정에서 내 귀를 만진들 ‘귀걸이를 끼우는데 도와줄게’란 마음으로 집중할 뿐이란 걸. 많은 이들이 분명 혀를 찰 거다. 해에게 이 이야길 글로 쓸거라 말했을 때 신중하라 조언했다. 근데 누가 내로남불이라 욕한 들 우리 사이는 문제가 없다. 우린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신뢰할 수 있는 대화와 행동을 쌓았다. 이게 우리의 연애일 뿐이다.
연애를 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질투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볼 수 있게 하고 치졸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싫어지고, 내가 낯설어지는 것, 그것이 질투다. 하지만 그 치졸한 감정은 사랑을 하는 인간에게 마땅한 감정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 난 우리 연애밖에 모르지만 오랜 연애를 통한 소신은 있다. 이런 연애도 있다는 것. 잘 된 대화 속에서 질투란 함께 풀어나갈 하나의 논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