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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Oct 14.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72 나도 그들처럼


  리스본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 여행자에게 소개받고 온 포르토 호스텔은 한국인 전용 호스텔 같았다. 같은 방에서, 지하 공동 주방에서도, 복도에서도 계속 한국 여행자들을 만난다. 그중 한 룸메이트는 부산 출신이면서 독일 남자를 만나 독일에 거주 중인데 일주일간 여행 왔다고 한다. 3년 동안 한국에 못 가서 향 수병으로 우울해하니 남자 친구가 여행을 보내줬다며 한국인들을 보니 그냥 숨통이 트인다며 반가워했다. 또 한 팀은 부모와 20대의 딸, 모두 셋이서 두 달 계획으로 중동에서 여기까지 왔고 스페인, 독일, 스위스 등을 돌거라고 했다. 온 가족이 함께 다니니 향수병도 덜할 것 같고 가족 모두 온전한 추억을 만들 것 같다. 셋 중 나이 든 엄마 얼굴이 제일 환했다.


  오늘 아침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어제 봐둔 골목 안 카페. 여태 체질식(내 체질에 밀가루 음식이 가장 나쁘다는 한의사의 처방대로 밀가루를 피하는 식사를 6개월 이상 하던 중이었다)한다고 꽁꽁 묶어 둔 빵, 케이크까지 다 먹고 다니니 도로아미타불 됐다. 이것도 지랄 총량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나 보다. 막 오븐에 서 나와 컵에서 꺼내지도 않은 뜨거운 치킨 페이스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생 오렌지 주스도 한 잔 주문했다. 커피가 딱이지만 밤에 잠 설치는 게 두려워서 지랄 하나만 만족시키기로. 역시 음식은 조리 후 바로 먹을 때가 최고 맛있다. 오렌지 나무가 가로수일 정도니 오렌지 주스도 싼 편이다. 한국에선 그다지 주스를 즐기지 않았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즉석에서 갈아 주는 생 오렌지 주스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다는 시계 종탑 성당, 클레리구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에 딸린 76미터의 종탑은 225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시내와 도루 강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데 올라가진 않았다. 그보다 더 높은 철교를 다녀온 걸로 충분했다. 성당 안은 오래된 천장과 벽의 화려한 장식과 색상들이 규칙적인 관리를 받는지 깔끔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본 여자들이 갑자기 다가와서 일본어로 말을 건다. 일본인에게 내가 일본 사람처럼 보였나? 스페인 할아버지들도 자포네(스페인어로 일본인)냐고 물었는데.


  근처에 아르누보 스타일 인테리어로 아름답다는 오래된 서점, 렐로 이르마오(Lello & Irmao)를 찾아갔더니 입장료 4유로를 받고 있었다. 역사적,‧미적 가치가 있는 장소니 입장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서점에서 책 판매보다 입장료 수입을 더 올리고 있으니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아무튼 앞으로 종이책의 수명이 다해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결국 여기도 삐죽 고개만 들이밀어 보고 패스. 언덕에 있는 서점을 따라 올라가니 또 으리으리한 성당이 두 개나 있고 그 주변도 예사롭지 않은 오래된 건물들이 보였다. 한쪽 기다란 측면 벽은 파란색, 아줄레주(작고 아름다운 돌이라는 뜻)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 시간이다. 문가에 있는 마리아상 앞에 나이 든 여자 한 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신 듯했다.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그 뒷모습, 등부터 허리까지 참으로 겸손해 보였다. 신께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깊은 진심만은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조용히 빠져나와 이번엔 광장이다. 포르토 관광의 시작점이라는 리베르다드 광장! 우리나라 광화문만큼이나 길고 널찍하다. 한쪽 끝엔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시청사 건물이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게 터줏대감처럼 서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광장을 둘러싸고 서 있는 건물 하나하나가 멋지다. 건물 하나만 제대로 알려 고 해도 한나절은 더 걸릴 텐데. 그저 잘생긴 보이 그룹 보는 것처럼 눈만 호강하고 깊이 사귀는 건 다음 기회에.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상벤토 기차역, 19세기까지 수도원이었다가 기차역으로 바뀌면서 내부 벽을 파란 타일, 아줄레주로 포르투갈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려 넣은 벽화로 유명한 곳이다.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기차가 떠나고 도착하는 역으로 생물처럼 몇 백 년을 살았고 또 살아가는 곳이 이렇게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여기선 일상을 벗어나 예술을 따로 찾아가지 않아도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 같다.

  

  도루 강을 따라 걷다가 들어간 성 프란체스코 아시시 성당은 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온통 금도금 장식으로 내부가 덮여 있다. 그 옛날 세월의 흔적이 덜할 땐 얼마나 번쩍거렸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강한 황금빛에 눈이 부셔서 아플 정도다. 신 앞에 나올 때 눈조차 뜰 수 없게 하다니. 역시 다시 ‘예수님이 원 한 건 이게 아닐텐데’란 생각이 든다. 이제 성당 관람은 더 이상 안 하는 게 좋겠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당대 권력자들이 세운 교회일수록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하니 답답하기도 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교회를 나왔다.


  포르토에서 아직 조용한 곳을 찾지 못했다. 빈 틈 없이 유적들이 시내에 빼곡하고 그 사이사이를 관광객들과 그들을 태워 나르는 버스들과 택시들, 공중의 공기마저도 그들이 만든 소음을 전달하느라 어수선하다. 도로와 건물에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잔디밭도 소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작은 공원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해바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앉아있기도 하니 나도 그들처럼 소음에 아랑곳없이 짧은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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