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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Nov 14. 2024

나의 가장 청정시대

그림책 #4. 색깔손님


내 안에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던 날.      

그 심장소리가 한참을 귓가에 그리고 마음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모성애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깊은 곳에 꾸욱 눌려져 있던 감정들이 꿈틀거리며 마구 솟아오르는 듯했다. 여자로 살아가며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경험이자 행복한 변화를 누릴 수 있는 열 달의 기간. 길을 지나다니며 본 배가 볼록 나온 둥글둥글한 임산부들의 평온하고 온화한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평온함과 온화함이 나에게도 풍기길 기대하며 동경해 왔던 것 같다.                


 내 임신소식을 친정에 알렸을 때 축하와 함께 엄마는 유모차 끌고 다니는 엄마들이 부러웠다며 딸 덕에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반가워했었다. 열 달 동안 아이를 건강하게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에 좋지 않은 기운과 감정들이 태아에게까지 전달되지 않길 바라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어떻게 자라기를 하루하루 기도하며 태교에 힘쓰려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태교 하던 그 시간은 내가 나를 품는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책 [색깔손님]은 아이가 다섯 살이 되고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세상을 바꿀 천 권의 책’ 프로젝트를 하던 중 알게 된 책이다. 그림책 속 할머니의 집은 색이 하나도 없는 회색빛에 집이었다.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할머니의 집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색이 하나도 없어 적막하고 삭막함이 느껴지는 집이다. 할머니의 표정도 어딘가 근심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이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어 두었던 어느 날 종이비행기가 창문으로 날아들어 오고 겁이 많은 할머니는 종이비행기를 난로에 태워 버린다. 그다음 날 할머니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집을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인 것이다. 작은 아이의 등장으로 할머니 집은 알록달록 색깔을 찾아가고 무엇보다 할머니의 표정이 소녀처럼 바뀐다.          

           

엘리제 할머니는 겁이 많아요.
거미도 무서워하고, 사람도 두려워하지요.
심지어 나무도 무섭대요.
그래서 할머니는 언제나, 늘 밤이나 낮이나 집 안에서만 지내요.        
            

 이 그림책을 보면서 임신 전 나의 감정 선과 아이를 만나게 된 임신 후 나의 감정 선의 차이가 [색깔손님] 할머니 집의 색감과 할머니의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더 밝은 생각과 에너지를 품으려 노력했었고 좋지 않은 음식보다는 좋은 것을 먹으려 했고, 혹여나 핸드폰에 전자파가 아이에게 안 좋을까 싶어 핸드폰도 멀리했었다. 피부로 전달될까 싶어 화장도 기초만 바르며 유난을 떨던 때가 있었다. 아이를 위함이 곧 나를 위함이었음을 그 덕분에 나 스스로도 가장 청정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왜 이렇게 까지 유난을 떨었을까?  아마도 이미 완성되어 내 안에 흐르고 있는 것들을 가능하다면 더 깨끗하게 씻어내 좋은 것들만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엄마가 지나왔을 삶의 뒤를 따라가며 쌓여있던 갈등들에 껍데기가 하나씩 벗겨지고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을 엄마에게 나는 얼마나 애지중지한 존재였을까, 엄마에게 내가 찾아온 건 20대 초반. 활짝 꽃 피우며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 시기인지 나 또한 지나 보낸 시절이었으니 내 젊음대신 내 안에 또 다른 작은 생명체가 우선이 되어가는 삶에 엄마가 얼마나 충실했는지 어린 시절 사진들이 증명한다.     

          

엄마에게는 자식이 주는 또 다른 처음이 다가왔기에 나에게는 엄마가 걸어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폭이 가까워졌기에 결혼 후 임신을 하면서 엄마와 나는 공통분모가 늘어가면서 벗겨진 껍데기들이 각자의 밴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색깔 손님 집에 처음으로 찾아온 작은 아이처럼 첫 아이는 나의 표정과 내 마음의 색깔을 입혀준 귀한 손님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배에 손을 얹고 제일 먼저 꼬마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기분 좋은 음악을 틀고 하루를 시작하고 나의 동선과 일정을 아이에게 아이언어로 전해주며 일과를 보내고 배에 손을 얹고 오늘하루도 감사함을 기도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이 생기면서 하루 온종일을 긍정에너지로 채우려는 주파수가 맞추어졌던 것 같다.                

 아이는 클래식에는 마치 발레를 하는 듯 슥슥 밀어내는 태동을 발랄한 음악에는 리듬을 맞추듯 툭툭 치며 태동했다. 초음파와 태동으로만 느낄 수 있는 아이였지만 나에게 찾아온 귀한 손님은 나의 하루를 온전히 나눌 수 있는, 나의 감정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나를 담아낸 작고 귀한 또 다른 나였는지도 모른다.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가득했던 내 몸 안에 두 개의 심장이 같이 뛰던 그때. 아이를 출산하고도 한동안은 배에 손을 얹고 귀여운 손님과 나누던 태담과 태동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아이로 인해 내가 가장 청정했고 나를 품을 수 있는 회복의 시간이었음을,,

무채색 내 마음에 찾아와 준 알록달록 귀여운 색깔손님.      



할머니는 아주 오랜만에 책을 소리 내어 읽었어요.
동화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아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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