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verybody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버벅댄다. 주인공이 되어 칭찬을 받고 싶지만, 그만큼 따라오는 사람들의 비난이 무섭다. 내가 실은 허술한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 간파할까 봐 경계하게 된다.
평생을 자신감에 찬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유롭고 차분한 사람, 어떤 순간에도 초연한 사람.
하지만 그런 것을 갈망하면 할수록, 산들바람처럼 작은 변화에도 태풍을 맞은 듯 휘둘렸다.
드라마 <닥터후>에서는 두려움을 이렇게 다룬다.
“저 녀석이 무서워?"
"네."
"다행이다. 왜 다행인지 알아?" "왜요?"
"무서우면 어떻게 되는지 말해줄게.
심장이 정말 빨리 뛰는구나. 손만 잡아도 느껴지네. 심장이 뛰면 네 피와 산소가 뇌로 엄청나게 흘러 들어가거든. 그럼 연료 채운 로켓처럼 엄청나게 빨라질걸. 누구든 해치울 수 있지. 평소보다 훨씬 더 높이 점프할 수 있단다. 속도가 얼마나 빨라지는지 시간도 앞지르게 될 거야.
무서워해도 괜찮아. 뭔가를 무서워하면 초능력이 생기니까! 결국 이 방에서 제일 무서운 건 너야."
"정말 많이 무섭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네가 아주 현명하고 강인하다면 두려움 때문에 잔인하거나 비겁해질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넌 선해질 거야.
두려움은 우리 모두의 동행자야."[1]
두려움은 쓸모없는 감정이라 여겼던, 나약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한 얼굴을 연기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왔던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딱밤을 한 대 맞은 듯했다.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표를 맡았을 때, 10분만 서있어도 다리가 아팠던 내가 1시간 내내 서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순간, 숨 쉬는 법까지 까먹을 만큼 긴장했던 결혼식 내내 힘든 줄도 몰랐던 날이 떠올랐다.
어쩌면 긴장, 공포, 분노 같은 다른 싫은 감정들도 관점만 바꾸면 나를 도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서운 감정들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몸이 위기에 빨리 대응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부여하기 위해 생겨난 감정일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것조차 커다란 자극이어서 외면해왔던 아픈 감정들.
길들이기는 힘들지만 다룰 수만 있으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야생마 같은 감정.
이제는 이 질주하는 힘을 타고 원하는 곳으로 떠날 것이다.
흐린 구름이 모여 앉은 날, 제주 어느 통나무집의 계단을 오르면, 하얀 커튼이 나풀거리는 틈으로 테라스가 드러난다. 테라스에 놓인 고동색 통나무 의자에 둔각으로 기대어 앉은 나와 무릎 위의 아기. 우리의 눈앞에 바다의 지평선과 하늘과의 희끄무레한 경계, 전깃줄 위를 썰매 타는 빗방울, 까만 돌담, 녹색 머리칼을 흩날리는 야자수가 펼쳐진다. 비스듬히 내리는 비에 무릎이 축축해져도, 맑은 날 여행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마저 씻어주는 시원한 비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추모공원에서 엄마의 발인을 하던 날 내리던 굵은 빗줄기와 성분은 똑같을 텐데. 어떤 기억이 젖어 있는지에 따라, 기분 좋게 시원할 때도 있고 세상도 나처럼 울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기쁜 날, 슬픈 날, 화나는 날. 시시때때로 비가 내릴 것이다.
당신이 어떤 비를 맞이하더라도 사이사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1] 닥터후 시즌 8, 4회, L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