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셀프청탁 에세이
신랑과 드라이브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일요일 밤, 신랑은 은행원의 고단함과 진상고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놨다.
매일 반복된 얘기가 조금 지루했던 탓인지, 잠자코 듣고 있다가 그에게 일침을 날렸다.
"자긴 힘들다는 얘기는 꼭 나한테 밖에 안 하더라. 엄니랑 아버님 앞에서는 지금 회사 다니는 게 자랑스럽고 위세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내가 샐쭉거리며 말하자, 신랑이 하는 말.
"나는 힘들다는 얘기는
당신한테 밖에 못해요."
그렇구나. 내가 이 사람한테 '힘들다'는 얘기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구나.
특수한 자격증이 발급되어 내 손에 배달된 것 같았다. 인생에 딱 한번 받을 수 있는 도장이 내 손목에 쾅하고 찍힌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의무가 주어져 묘한 책임감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대충 둘러댄 말에, 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싶어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내가 유일한 사람이에요?"
"당연하지. 내가 누구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해."
부부란 이런 것인가.
내 옆에 곤히 잠든 그를 보며 그의 숙면을 기원하고 좋은 꿈 꾸길 빌어줄 때, 그의 수다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할 때, '나도 비로소 부부가 되었나 보다'하고 자각하곤 했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약한 남자'로서의 고백을 듣게 될 이런 순간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회고해 보았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과연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일까.
가까운 이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았었는지를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이런 경력이 과거에 있었나 싶었다.
단언컨대, 상대방을 잘 위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중학교 친구와 절교한 적도 있고, 십 년 절친으로 지낸 언니들에게 '참 사람 서운하게 만드는 애'라는 혹평도 들어봤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부여받아온 이미지는 분명 '정은 많지만 단호한 사람'이다.
그랬던 내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편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게 신기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람 눈엔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까.
"나는 당신한테밖에 힘들다는 얘기 못해요."
그의 그 많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추억을 공유한 그 골목 친구들을 모두 뒤로하고,
내가 바로 그에게 커다란 그늘이 되어주는 아름드리 나무이자 울어도 되는 다락방이란 말인가.
나를 안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무슨 마법에 홀린 걸까.
이상하게도 그 이후, 나는 그에게 좀 더 듬직하고 한결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의 슬픔이 나에게 들키더라도, 설사 가볍게 여겨질까 그가 우려하지 않도록 내가 그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비싼 자동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유일한 존재라서 귀한.
"저는 누군가에게 큰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큰 슬픔을 안아주기도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명찰이 내 왼편 가슴에 붙은 것 같았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린아이의 손금을 보는 척하며 한 어른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을 무심코 했는데, 그 아이가 동기부여된 나머지 정말 대통령이 되었다는, 플라시보 효과를 바탕으로 한 현대판 설화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마치 그 어린아이에 동화되어 갑자기 인자한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다지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설화 속 그 아이에 비해 내가 너무 오래 살았고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또다른 어른이 생각났다.
29살이던 나를 기획팀 내 차석으로 파격 채용했던 대기업 임원 한 분의 말이다.
"사람은 연기를 잘해야 돼.
네 마음은 안 그렇더라도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해주면 부채감이 쌓여서, 그 사람은 너한테 고마워할 수밖에 없거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진실되지 않은 말과 거짓을 종용하는 것 같아서 심히 실망했었지만, 10년이 훨씬 지나 지금 다시 고찰해 보니, 그 임원의 얘기가 긴 경험이 녹아든 통찰이었다고 고개 끄덕여진다.
대통령이 된 그 아이처럼 한껏 고양되어 내 삶을 비장하게 바꿀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며 신경전을 벌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어떤 동기에서 행해지든, 그가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성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그의 고백에 실제로 '듬직한 여자'가 되든,
'듬직한 척' 연기를 하든,
그가 나로 인해 살만한 세상으로 느껴지길 바란다.
어떤 인생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과,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참 많이 다를 것 같다.
눈물짓게 하는 세상일지라도, 한없이 약해져도 되는 존재가 곁에 있다면, 그 세상은 살만하지 않을까.
.
그의 회사 푸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당장 그만두라'는 얘기만 해댔다.
그는 분명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말 그만둬도 되냐'며 좋아했었는데.
친구들에게도 자랑했었댔는데.
이제는 그런 말보다 '고생했다'며 엉덩이 토닥여주어야겠다.
약한 내 남자. 이리 와.
오늘도 고생하셨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