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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노예에게 뮤직 큐

주 1회 셀프청탁 에세이

by 기맹드

하루 종일 먹구름이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날씨 때문에 안 그래도 기분이 처지는데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듣다가는 원하지 않는 술자리에 끌려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잘 먹은 점심도 게워낼 것 같다.

밝고 희망찬 장조(major key) 노래보다는 그리움이 묻어나는 단조(minor key) 멜로디가 좋을 것 같다.


이런 날은 수백 가지 감정 중 '센티멘탈' 방을 먼저 노크해 주어야 한다. 적재의 <야작시>를 슬그머니 틀어본다.

'그래. 듣기 좋네.'


내 하루의 기분은 날씨에 따라 초기 세팅된다. 흐린 날이 반복되면 아무래도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질퍽하면 질퍽한 대로 그 날씨에 찰떡인 음악을 들으면 오히려 감성이 풍부해지고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 순간을 잘 맞이하는 것도 일종의 기분 관리, 감정 훈련인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생각없이 신고 나온 메쉬형 운동화 덕에 양말도 젖었고 내 기분도 잡쳤다. 이런 기분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출근한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합의하기 싫은 운전자처럼 아주 대쪽같이 굴고 싶다.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이 노래 저 노래를 사정없이 넘긴다. 그러다 딱 맞는 음악이 운 좋게 걸린다. 삐죽삐죽 날 섰던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두 번 정도 더 반복해서 들으면, 하늘을 찌를 듯 무섭게 성을 내던 파도가 이내 하얗게 부서져 모래에 퍼져나가듯 내 마음도 제자리를 찾는다.


날씨, 기분, 음악 삼 형제가 불협화음 하지 않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느낌이다.

필라테스한 것마냥 평정심도 찾아온다.


러면 이제 기분의 눈치를 덜 봐도 된다. 보사노바를 듣고 싶다. Eliane Elias도 좋지만 귀에 더 익숙한 Lisa Ono가 어울릴 것 같다. 근데 또 너무 보편적인 곡보다는 모험심을 발휘하여 살짝 낯선 곡인 <Ela E Carioca>을 선택해 본다.


추억은 노래에 딸린 사은품인가? 추억도 떠오른다.

2009년, 동생과 유럽여행 갔을 때
함께 음악을 듣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우리는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을 갔다가 클림트의 작품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다. 궁전 안 인적 드문 곳에 보물처럼 숨겨진 숲길을 발견했다. 대낮이라도 남의 나라이니 긴장 풀면 안 된다며 사람과 사물 모두를 경계하며 지냈던, 갓 스무 살 된 동생은 벤치에 정자세로 앉았고, 잠시라도 느슨해지고 싶은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버렸다. 그러자 마음 쓰인 동생은 다섯 살 많은 언니에게 잔소리 대신 자기 무릎을 조용히 내주었다. 나는 동생의 동생이 된 것 같았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스르르 눈이 감겼다.


동생은 줄이어폰을 꺼내 MP3에 꽂았다. 한쪽은 자기 귀에, 다른 한쪽은 내 귀에 끼웠다. 아마도 아주 고심하며 노래를 골랐을 것이다.

챗GPT 유료의 힘은 엄청나다

봄 햇살처럼 기분 좋게 간지럽히며 살랑대는 보사노바 리듬에 Astrud Gilberto 음성이었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키 작은 나무가 바람에 맞춰 가지를 흔들며 춤춘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감은 내 눈앞에 일렁거린다. 서해의 얕은 물결에 얼굴을 담근 느낌이다.

일렁일렁.


눈을 감았는데도 이곳 바람이 보인다.

우리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가 거두어졌다가 다시 생겼다를 반복한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빛무늬가 클림트 그림만큼이나 화려하다.




그때가 6월 말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잠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기억력이 무딘 나지만 그때만큼은 '이 장면은 평생 기억될 것 같다'라고 예감했었다. 나의 소중한 추억 조각이 될 수 있도록 눈을 감은 채 온몸의 감각으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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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동반된 추억들은 그때 그 장소로 바로 이동 가능한 하이퍼루프가 생성되는 것 같다. 특정 음악을 들으면 코의 점막이 확장되고 귀가 활짝 열리는 것 같다. 온몸의 감각이 활발하게 기능한다.

여름에도 입김이 나올 것처럼 한기가 느껴지고 겨울에도 땀이 날 것처럼 열기가 느껴진다. 그때 그 장소가 그랬던 것처럼 이내 추워지거나 더워진다.


추억과 상상은 현재를 살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추억은 박막례 할머님 말씀처럼 '돈으로 만드는게' 맞는데,

그렇게 만든 추억은 나중에 또 돈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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